감옥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는 국가기관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 또한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는 해방이 된 후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서, 서울구치소 등 이름을 바꿔갔지만 기본적인 역할은 같았다. 감옥의 이름이 죄 있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의미가 강한 형무소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교도소, 그리고 교도소와 구치소가 분리되면서 구치소로 변경되었지만 그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감옥은 그 사회의 어두운 곳을 보여주지만 그 사회의 권력갈등의 최정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권력을 잡고 있는 지배집단의 성격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 사회의 인권의 수준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곳이 감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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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정문. 1967년 이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었으며,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되면서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를 연장하려다 하와이로 망명하고 부정선거를 실시한 최인기 등 내무장관은 군사정권에 의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이승만대통령 집권기에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죽을 뻔한 박정희는 그의 재임기간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대통령을 죽이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고, 박정희의 암살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대통령은 실재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김대중대통령은 사형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기도 했다. 이후 김영삼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운동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처벌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온 국민을 충격에 빠지게 했는데, 우리 사회의 이러한 정치보복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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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자신의 임기 동안 많은 민주인사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일부는 사형을 시켰다.

독재기도와 쿠데타,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에게 구속당하는 대통령이 많은 것이 우리 현대사이다. 이렇게 전임 권력과의 갈등이 큰 것은 권력이 권력을 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간에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반 국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매우 취약하여 권력집단간의 권력경쟁으로 권력이 사유화되면서  권력경쟁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감옥은 권력을 쥔 집단이 사회에서 배제하고 싶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다. 우리 현대사는 큰 굴곡과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가 많았다. 서대문형무소 또한 투옥된 사람들을 보면 역사에에 배제된 현대사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해방이 된 후 초창기에는 친일파들이 반민족특별법에 의해 구속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일파가 사회의 주요 분야에 중용되면서 이제는 역전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이 중에는 간첩혐의 등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일종의 역청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해방후 좌우익 갈등으로 남한에는 공산당 등이 불법화되면서 전국의 감옥은 좌익인사로 넘쳐난다. 결국 해방이후 정부수립에 동의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과 좌익들은 사회의 주요 구성원에서 배제되었다.


이승만정부와 박정희 정부,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감옥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 노동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하는 지식인과 종교인, 그리고 이성에 따른 실천을 하는 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갖고 있는 집권자들이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고 했고, 권력집단이 도덕성과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민주화된 개혁정부에서도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있다는 점은 개혁정부조차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용산 철거민들이 구속된 사실은 현재의 집권한 정부가 주거권을 요구하는 사회 최하위층의 요구를 무시하고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네르바의 구속(법원에 의해 석방되었지만)은 평범한 사람조차 구속될 수 있는 이명박정권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렇게 감옥에 누가 갇혀 있는지를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지배집단의 성격이 무엇인지 분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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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기술자' 이근안

또한 감옥은 우리 사회의 인권의 수준을 보여준다. 죄을 짓고 수감되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인권의 바로미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도 아닌데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고문은 주로 정치범에게 자행되었지만 일반 수감자들 또한 처음 체포될 때부터 감옥에 수감되어 생활할 때까지 일상적인 폭행과 법과 규칙에 근거하지 않는 처벌을 받았다. 지금도 감옥에서는 독방구금 등 각종 처벌이 남아 있다. 법과 규칙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처벌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일반적인 교도소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다. 흉악범들과 일반 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서대문형무소는 이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람들과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먹고 사는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즉, 우리 사회의 발전과 다양성을 위해서 하나의 당당한 주체로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체성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 민주화인사들과 노동자들의 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되고 이만큼 살 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춥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또한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민주국가를 만드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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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서대문형무소



개화운동으로 투옥된 이승만대통령,

재임기간 가장 많이 사형시켜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개화・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성감옥의 전신인 전옥서를 시작으로 서로문감옥을 거쳐 서대문감옥에서 6연여의 옥고를 치뤘다. 이승만대통령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독립졍신'을 비롯하여 '한영사전' 그리고 여러 편의 논설을 썼다. 해방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두 번씩이나 서대문감옥을 시찰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에 그에게 도전하는 많은 정치범을 투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는 몇 명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승만대통령 12년 동안 집행된 사형건수를 보면 335명으로 월평균 2.4명을 사형시켰는데, 이는 월평균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승만정부시설 좌우익 대립과 친일파청산 문제 등으로 최남선 등 친일파들이 수감되기도 하지만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대립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친일경찰의 발호에 맞서 싸웠던 최능진은 친일경찰들과의 대립으로 권고사직당하고, 이후 선거에서 이승만의 선거구에 나왔다가 이승만세력의 방해로 후보등록이 무효화되고, 한국전쟁 와중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을 당한다.(1951. 2.11) 또한 대한민국 초대국회의 부의장과 이승만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간첩혐의로 처형하였다.




<경향신문 2009.10.11>




좌익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박정희대통령,

쿠데타 후 수많은 정치・사상범 사형시켜


박정희대통령 또한 자신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이승만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죄없는 많은 정치범을 사형시켰다.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남북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김구와 김규식 등의 민족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2개월 뒤에 여수와 순천에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대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없애는 숙군작업이 일어났다. 1948년 11월 박정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좌익혐의로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 박정희의 자백이후 군내의 만주인맥들의 구명이 이루어졌고, 그는 형인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사망하면서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으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승만정부에서 좌익혐의로 사선을 넘나들었던 박정희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4.19 당시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최인규내무장관과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 정치깡패두목 이정재를 사형시켰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괴뢰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해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받은지 넉 달만에 사형을 당했으며, 북한 지령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조종하고 국가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인혁당 사건 희생자 7명은 사형 확정된 지 18시간만에 사형 당했다. 박정희정권 기간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악연과 화해?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전두환 중심 신군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대통령은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또한 신군부가 집권을 하면서 김영삼대통령 또한 가택연금을 당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중형을 선고한 반면, 전두환정권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이 당선된 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해서 이들이 사면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김영삼대통령은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사면하고, 며칠 뒤인 12월 30일에는 231)명의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민간인 수백명을 죽인 권력자는 사면을 받는 반면 흉악범이라는 개인들은 조용히 사라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가?



1) 김삼웅은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의 ‘이승만과 서대문감옥’편에서 ‘우남(이승만)이 언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옥고를 치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무기로수 감형된 우남은 언제부터인지 서대문감옥으로 옮겨져서 비교적 수월한 옥살이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승만대통령은 1904년 8월 9일에 석방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은 1908년에 신축되었으므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함.

2) 정부수립이후 920명을 사형시켰다는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의 기록에는 김영삼정부에서 11명을 사형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기록간에 상이한 부분이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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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운찬 2009.12.22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지만... 생각해 볼 글이네요.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만행을 생각하며... 그런 만행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기억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화길라잡이로 활동하시나 보네요. 멋진 활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2. 연세대생 2011.11.2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년 이승만은 많은 교훈을 준다. 나중의 독재행적과는 구별되는...

  3. 까망가방하양필통 2016.08.28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와 글 잘 보고 갑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와서 다녀온 후기를 적으면서
    특히 해방후에 이런저런 사실들에 먹먹한 감 숨길수 없네요,
    여기 글중에 일부는 발췌하여 옮겨적습니다.
    원글 발췌한곳 분명히 표기하겟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시청광장의 분향소에 들러 분향을 했다. 이른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은 없었지만 숙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다녀간 사람들이 포스트잇으로 그가 가는 마지막길에 한마디씩 명복을 비는 말을 써서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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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날 부산출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김대중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죽음이었기에 처음에는 담담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상황 때문인지 어쩌면 나름 만수를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죽음이 마음 한편에서는 쓰디쓴 슬픔으로 아려왔다. 뭐라고 할까? 팔팔한 젊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몇 달전에 지켜봤는데, 이제는 그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한 고령의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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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우리 아버지는 그의 연설 테이프를 사서 들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였고, 나는 처음으로 투표를 할 때 그를 찍었다. 물론 당시 그는 당선되지 않았고, 다음 선거에서는 당선되었지만 나는 그를 찍지 않았다.

김대중!
그는 반공주의자였지만 끊임없이 기득권세력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사선을 넘기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일부 몰지각한 극우들로부터 빨갱이로 오해되고 있다. 그는 반공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와 대화를 할 줄 알았고, 그의 주변에 우파들이 빨갱이로 오해할 만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이러한 오해를 분명히 불식시킬 줄 알았다. 대한민국 보수정치인의 생명이 반공에 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보수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고, 보수의 척박한 토양에서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끌어 올리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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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장례가 국민장이 아니라 국장이고, 빈소가 국회의사당 본관인 것, 그의 장지가 대전 현충원이 아니라 서울 현충원인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어느 누구보다 많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한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야당 정치인의 죽음이 국장으로 치뤄지고, 국회의사당 본관에 빈소가 마련되고, 서울의 국립현충원에 매장이 된다는 것은 그의 죽음으로 한국의 야당 또한 대한민국의 적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의 뜻일 것이고, 그러기에 정부가 국민장을 제안할 때 박지원의원이 가족장으로 할 지언정 국민장으로 하지 않겠다고 말한 뜻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의 죽음으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토대가 한층 단단해지는 계기가 된 셈이고, 대한민국도 한층 정통성이 있는 국가로 발돋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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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형식과 관련해서 유족들과 마찰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에는 노제문제가 합의가 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명박정부와 유족과의 문제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와 국민과의 문제로 봐야 한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일반 국민들이 지켜보고, 마음속에서 그를 선선히 보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마지막까지 속 좁은 모양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지만 우리 인생의 한 단계이고 이것을 순리대로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렇기에 장례라고 하는 집단적 행위가 있으며, 그러한 집단적 행위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사회의 주역인 현대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는다. 대중들은 김대중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면서 그의 죽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국민들의 소박한 마음과 심리를 모르는 이명박정부는 참으로 어리석은 정부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부디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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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선생 서거 50주년을 맞아 여야 정치계, 특히 진보정당에서 그 분을 조명하는 행사가 어제 열렸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은 북진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론을 정립한 정치가로, 진보신당은 진보적 대중정치인으로 조명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사민주의자로서 조봉암을 평가하고 있다. 각자 처한 입장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객관적으로 봐야 할 점은 이런 게 아닐까한다. 조봉암은 북의 혁명노선에 동의하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도 참여했다. 물론 대한민국의 주류는 그를 버렸다. 조봉암은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참여했지만 대한민국의 기득권세력은 그를 버렸고, 이후 민주화운동은 그런 역사의 반복이었다.

그의 평화통일론은 남반부의 혁명을 통해 폭력적으로 남한을 통일시키겠다는 북이나, 북진통일을 통해 강제적으로 통일하겠다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였다. 민주노동당의 조봉암에 대한 조명은 일부분 맞지만, 북한 또한 남진통일을 실재로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이후에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인정없는 조봉암에 대한 조명은 아주 편의적이고 정치적인 조명일 뿐이다.

진보신당은 조봉암의 진보적 대중정치인으로서의 리더쉽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은 우리가 충분히 공감하고 존경하는 부분이다. 항상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낙천적이었던 그 분의 성품은 운동을 좋아하고 쾌활했던 여운형선생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진보신당이 대중정치인으로서 조봉암을 조명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봉암선생의 진보당이 대중조직과의 연계가 없었다는 한계가 그대로 진보신당의 무기력한 현재 상태에 대한 변명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지금은 조봉암선생이 정치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이 좋기 때문이다.

주대환씨 등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연대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조봉암선생을 조명하고 있다. 분명 그런 부분이 있지만 과연 그 분이 스스로 사회민주주의자로고 했는지도 의문이고, 과연 그런 방식으로 딱지 붙여서 누구를 조명하는게 올바른지 의문이다. 조봉암 선생은 당시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혜쳐나가야 할 과제와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했을 뿐이다.

아래는 레디앙의 조봉산 선생 관련 기사(
지금 왜 조봉암인가?)에 달린 댓글인데, 많은 부분 공감이 간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매우 원칙적인 비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나 또한 예전에 그렇게 했기에 뭐라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한 나도 보았지만 이정우교수가 조봉암과 노무현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쾌하다.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은 제로이거나 마이너스이다. 그의 서거를 슬퍼하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당연한 감정과 이명박의 정치적 탄압속에서 동병상련과 지켜주지 못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추진한 한미FTA, 비정규직법, 이라크파병을 어떻게 감출 수 있나? 농지개혁을 주도했던 조봉암과 한미FTA와 비정규직법 개악을 주도했던 노무현,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조봉암과 이라크파병을 어쩔수 없는 것이라면서 파병을 강행했던 노무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어짜피 과거의 인물에 대해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기본적인 속성일 것이다. 다만 과거 조봉암을 쳐다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그런 자신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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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2009-07-29 17:54:19  
 
조봉암을 바로보라.
그는 민주주의에 충실했고, 남한내부적으론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전한반적으로 중도파였으며, 미소와 이승만 김일성의 길이 아닌 제3의길을 제시했다. '피해대중의 정치'를 무슨 노무현과 연결시키는 노빠들, 통일지상주의로 해석하는 종북민족파들,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자들은 X잡고 반성해야한다. 려운형을 계승한 진보정치, 민주주의, 독자적 대안에 의한 자주노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민주주의
  2009-07-29 18:01:13  
 
죽산을 왜곡 해석하는 건 범죄다.
노빠무리는 그뿌리가 한민당이란걸 숨기려는 것이고, 민노당의 주류 자주파는 60년대 초 사회당과 이후 통혁당으로 이어지는자들에 정서적으로 뿌리가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조봉암을 김일성보다 나쁘다(조병옥), 조봉암은 변절, 기회주의(녹슬은 해방구에 나오는 주류좌익들)라고 매도했던 무리들이다. 그들의 후예들이 조봉암을 파는건 범죄다. 뉴라이트에 대비되는 의미로 뉴레프트인 주대환류는 더말할 나위가 없다.


민주주의
  2009-07-29 18:06:50  
 
오늘자 경향에서 이정우가 개소리하더군요.
그래도 이정우정도는 다르겠거니했는데, 졸지에 노무현을 죽산에 비교하더군요. 대통령까지 지내고 부정부패 비난 못견뎌서 자살한 자를... 죽산은 남한에선 진보이며 전한반도에서 중도이었지요. 현재적으로 말하자면 심상정 노회찬의 진보신당 같다랄까? 북구지향이랄까? 한미에프티에이하고 한나라당과 영남 대연정 추진한 신자유주의자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지요,


 민주주의
  2009-07-29 18:11:20  
 
력사의 의미를 심장에 새기자
1958.9년을 지나면서 남의 조봉암, 북의 김원봉, 안재홍, 김두봉등이 모두 정치무대서 사라졌지요. 한쪽에서 의미가 없어지면 다른쪽에서도 의미가 없어진다는...남쪽의 민주주의와 진보세력은 분명 북의 전체주의 1인 세습체제에도 부담입니다. 그런점에서 엉뚱한 짓거리로 소일하고 대북입장도 모호한 민노당이야말로 민중의 력량을 소모하는 어리석은 집단입니다.


민주주의
  2009-07-29 18:21:26  
 
려운형과 조봉암을 굳이 말한다면...
2차대전 전승영웅 처칠을 격침시키고 집권한 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실현시키면서 해외식민지는 서서히 포기하고, 핵무장으로 소련에 맞섰던 영국노동당, 베트남전과 체코침공을 동시 비판한 팔메의 스웨덴 사민당정권, 냉전하 공산당과 손잡고 집권한 후 내부복지와 인권을 신장하면서 미국주도 군사동맹엔 거리를 두면서 소련을 격렬히 비판했던 미떼랑정권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노무현인가? 친북자주인가?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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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도 그랬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뉴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지 두 달도 안되었는데 김대중대통령이 위독하다고 하니 뭔가 기둥이 쓰러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전두환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건강한데 유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망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니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1992년 선거에서 찍었지만 떨어졌고, 1997년 선거에서는 그를 찍지 않았지만 당선되었다. 그는 IMF를 극복했다고 했지만 서민들의 삶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진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용카드를 남발할 때부터였다. 물론 남북관계, 민주주의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그를 당선시켜준 사람들의 삶이 고단해진 것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쾌유를 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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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서중석교수의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사비평사, 2008)를 읽었다.

서중석교수의 글은 지난해 KYC(한국청년연합회)에서 강의를 들은 후 계속 읽어왔는데
글이 따뜻하면서도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분위기는 70년대를 겪었던 분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하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 것 같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는 모두들 정치를 욕하고 선거를 비하하는 세상, 특히 그들만의 선거로 전락하게 만드는 집권자의 권력의지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한국현대사에서 선거는 운동의 기폭제였고 매개자로서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거를 일상적인 활동의 결과로 보는 단순함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가 헤겔의 '역사의 간지'라는 표현을 썼듯이 권력자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무척 즐겁게 읽었다.
더욱 흥미있는 부분은 최근 선거에서 양김(김대중, 김영삼)에 대한 평가로 특히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하여 김대중 책임론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노무현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우호적이었다. 어째튼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도 시간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명박정부와 관련해서 흥미있게 읽은 부분은 다음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폭로했는데, 그 직후인 5월 26일 당시 권력의 핵심이 전부 바뀌었어요. 국무총리, 국가안전기획부부장, 검찰총장, 범무부장관이 다 바뀌었습니다.그러고는 6월 10일부터 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제대로 대체룰 못했습니다. 6월민주항쟁과관련해서 이 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본문 220쪽)

즉, 전두환이 권력의 핵심을 교체하는 바람에 위기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건데, 최근 이명박정권이 권력핵심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교체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 정권들의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고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교수도 이야기했지만, 박정희독재는 이승만독재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고, 전두환 독재는 박정희 독재를 극복하려고 했다. 결국 독재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 조차도 사회발전의 성과인지도 모른다. 독재자 조차도 이전 독재자의 전철을 밟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진보, 개혁진영도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명박정부가 독재인 듯 하면서고 꼭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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