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끝나고 평화길라잡이 선생님들과 한컷...

각기 다른 시간에 30분 간격으로 안내를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사형장에서 만나고, 같은 시간에 끝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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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집회가 승리로 마무리되지 못한 가운데

건국절 논란 등 이명박정권의 역사에 대한 딴지에 분통스러워 하고 있던 그때,

나에게  희망의 출구가 되어 주었던 평화길라잡이가 어려움속에서도 6기를 모집합니다.


역사의 현장을 평화와 인권의 눈으로 안내하는 평화길라잡는 

나에게 항상 깨어있게 했고,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나를 단련시켰습니다.


이제 6기를 모집합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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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첫번째 서대문형무소 안내를 했다. 오늘 오후 2시에 단체안내가 예약되어 있었다. 인원인 32명이었고 서울kyc에서 나와 홍재석샘이 안내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만들어주었다. 요즘 일이 너무 바쁜 관계로 초등학생은 홍재석샘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나는 중고생을 안내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안내하기 가장 어려운 계층이 초등학생이기 때문이다. 아직 아는 역사적 사실이 적고, 역사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별도의 자료를 준비해갔고, 역사관 가는 전철안에서 매뉴얼을 다시 점검했다. 동선을 어떻게 짤 것인지, 무엇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할 것인지, 관람객들과 어떤 주제로 공감을 얻어낼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1시간전에 도착했다. 보통은 30분 전에 와서 준비를 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미리 와서 공부도 하고 준비를 해야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대문형무소에 몰입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몰입이 되어야 관람랙들에게 최소한의 내용이라도 전달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내가 안내를 시작할 안내판 주위의 눈을 치웠다. 역사관에서는 관람객 동선중심으로 눈을 치웠지만, 나는 전체 시설배치도를 볼 수 있는 보안과청사에서 시작을 한다. 사무실에서 휴대용마이크도 빌렸다. 필요하면 다른 관람객들의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마이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마이크가 있으면 작은 목소리로도 호소력있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날이 많이 풀려서 관람객들이 많았다. 예약된 관람객들은 조금 늦게 왔다. 팀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초등생과 중고생을 분리해서 안내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안내를 시작했다. 보안과 청사에서 재미있는 퀴즈를 시작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답을 잘맞추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은 쾌활했다. 내가 맡은 중고생팀은 아이들 13명에 어른 2명이었는데 안내를 시작하자 다른 일반인 관람객들이 추가로 안내를 들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내 생각으로는 오늘은 따뜻한 날이었다. 하지만 야외에서 오랬동안 있기에는 여전히 추운날이었다. 아이들은 안내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춥다고 외쳤다. 아이들은 추위보다도 간지있고 엣지있게 보이고 싶은 생각때문에 두껍게 옷을 입고 오라는 지도선생님의 말씀도 헛일이었는지, 참으로 얇게들 입고 왔다. 참고로 나는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12월 안내를 할 때 가볍게 입고 안내를 하다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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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12옥사에서 안내는 최악이었다. 예약팀 10여명에 추가로 7~8명이 듣는 바람에 안내대상이 많아지고 산만해졌다. 특히 겨울에는 옥사는 더욱 춥다. 아이들은 추위에 움츠리고 장난치고 딴 데 재미있는 곳을 응시하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출발한 홍재석 선생님이 안내하는 초등학생팀이 내 바로 앞에서 안내하고 있어서 내 안내가 끝났는데도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2옥사 입구에서 계속 안내를 했더니 추가로 결합했던 일반인 팀들은 먼저 가버렸다.

사실 나는 12옥사 안내를 할 때 독립운동의 의미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독립운동은 민주화운동과 같은 개념이라는게 일관된 내 입장이고 항상 강조하는 편인데, 그럴려면 순서에 따라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날씨는 춥고 아이들은 산만하고, 주변은 더 산만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안내를 해야 할지 좀 답답하다.  제대로 안내하기 어려운 조건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결국 홍재석샘의 초등생팀 앞을 가로질러서 안내를 했다. 그리고 12옥사를 나온 후 11옥사를 가는 길에 화장실을 설명하면서 그때서야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안내를 하면서 항상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눈을 보면 내 이야기를 듣는지, 공감하는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단을 했다. 오늘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안내를 하자고... 그 후로는 어렵지 않게 안내를 했다. 아이들과 장난도 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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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이를 먹어가는지 학생들을 안내할 때면, 얘들이 너무 이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안내를 들으면서 한쪽에서는 눈싸움과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밉지 않은 것을 보면 나도 철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아이들은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이 날씨에 춥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내 안내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내가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솔직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고 아이들도 열심히 들어주었다.

안내가 끝나고 안내가 재미있었는지 물어봤더니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 안내가 끝나고 함께 안내한 선생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아이들이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더니, 다른 선생님들 말씀 왈, '그럼 재미있다고 하지, 뭐라고 말하겠어요'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그런 말 한마디가 힘이 되고 항상 재미있고 쉽고, 관람객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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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는 국가기관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 또한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는 해방이 된 후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서, 서울구치소 등 이름을 바꿔갔지만 기본적인 역할은 같았다. 감옥의 이름이 죄 있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의미가 강한 형무소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교도소, 그리고 교도소와 구치소가 분리되면서 구치소로 변경되었지만 그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감옥은 그 사회의 어두운 곳을 보여주지만 그 사회의 권력갈등의 최정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권력을 잡고 있는 지배집단의 성격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 사회의 인권의 수준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곳이 감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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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정문. 1967년 이후 서울구치소로 이용되었으며,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되면서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를 연장하려다 하와이로 망명하고 부정선거를 실시한 최인기 등 내무장관은 군사정권에 의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이승만대통령 집권기에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죽을 뻔한 박정희는 그의 재임기간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대통령을 죽이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고, 박정희의 암살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대통령은 실재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김대중대통령은 사형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기도 했다. 이후 김영삼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운동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처벌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온 국민을 충격에 빠지게 했는데, 우리 사회의 이러한 정치보복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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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자신의 임기 동안 많은 민주인사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일부는 사형을 시켰다.

독재기도와 쿠데타,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에게 구속당하는 대통령이 많은 것이 우리 현대사이다. 이렇게 전임 권력과의 갈등이 큰 것은 권력이 권력을 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간에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반 국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매우 취약하여 권력집단간의 권력경쟁으로 권력이 사유화되면서  권력경쟁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감옥은 권력을 쥔 집단이 사회에서 배제하고 싶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다. 우리 현대사는 큰 굴곡과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가 많았다. 서대문형무소 또한 투옥된 사람들을 보면 역사에에 배제된 현대사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해방이 된 후 초창기에는 친일파들이 반민족특별법에 의해 구속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일파가 사회의 주요 분야에 중용되면서 이제는 역전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이 중에는 간첩혐의 등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일종의 역청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해방후 좌우익 갈등으로 남한에는 공산당 등이 불법화되면서 전국의 감옥은 좌익인사로 넘쳐난다. 결국 해방이후 정부수립에 동의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과 좌익들은 사회의 주요 구성원에서 배제되었다.


이승만정부와 박정희 정부,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감옥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 노동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하는 지식인과 종교인, 그리고 이성에 따른 실천을 하는 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갖고 있는 집권자들이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고 했고, 권력집단이 도덕성과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민주화된 개혁정부에서도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있다는 점은 개혁정부조차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용산 철거민들이 구속된 사실은 현재의 집권한 정부가 주거권을 요구하는 사회 최하위층의 요구를 무시하고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네르바의 구속(법원에 의해 석방되었지만)은 평범한 사람조차 구속될 수 있는 이명박정권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렇게 감옥에 누가 갇혀 있는지를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지배집단의 성격이 무엇인지 분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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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기술자' 이근안

또한 감옥은 우리 사회의 인권의 수준을 보여준다. 죄을 짓고 수감되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인권의 바로미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도 아닌데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고문은 주로 정치범에게 자행되었지만 일반 수감자들 또한 처음 체포될 때부터 감옥에 수감되어 생활할 때까지 일상적인 폭행과 법과 규칙에 근거하지 않는 처벌을 받았다. 지금도 감옥에서는 독방구금 등 각종 처벌이 남아 있다. 법과 규칙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처벌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일반적인 교도소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다. 흉악범들과 일반 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서대문형무소는 이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람들과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먹고 사는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었다. 즉, 우리 사회의 발전과 다양성을 위해서 하나의 당당한 주체로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체성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 민주화인사들과 노동자들의 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되고 이만큼 살 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춥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또한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민주국가를 만드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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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 마리학교 학생 6명을 대상으로 안내를 했다. 10여년전부터 지역에서 친하게 알고 지내는 분이 마리학교 교모이시고, 그 분의 딸도 현재 마리학교에서 일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서울KYC에서 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안내를 들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가급적 일요일날 안내를 신청하기를 바랬는데, 학교 일정상 금요일로 일정이 잡힌 것 같았다. 내가 권유를 했기 때문에 지방에 갔다가 일찍 올라와서 안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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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무 추웠다. 너무 추워서 안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안과 청사앞에서 시작을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추워서 그런지 집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자세한 이야기는 실내에서 했다. 하지만 실내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잘 들어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서대문형무소를 안내할 때마다 독립운동이 단지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연결되어 있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 같은 개념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그래야만 안내를 듣는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의 의미가, 독립운동의 의미가 현재의 우리의 삶과 관계가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3.1운동기의 만세운동과 2008년의 촛불운동은 다 같은 것이다라는 식이다. 비약일 수 있으나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비폭력운동이었지만 3.1운동은 이후 독립운동의 방도와 목표를 일깨워주웠고, 작년의 촛불운동은 이후 운동의 기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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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안내를 할 때는 사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919건의 사형집행을 했는데 그 중에 250여건이 정치사상범이라는 신문기사를 보았고 이것을 적절히 참고했다. 전체 사형건수의 1/3이다. 이것조차도 엄청 많은 것이고 문명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두환정부이래 정치사상범의 사형집행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정권기에 사형수의 가장 많은 수가 정치사상범이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 지배권력은 정치사상범을 흉악범보다 더 죄질이 나쁜 사람으로 취급한 것이다. 정말로 치가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형장에서 안내할 때 사형제를 찬성하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반드시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형제는 단순한 사형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범과 흉악범은 다르지 않냐고 하지만 4.19의 민주주의를 짓밟고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사회정화차원에서 정치깡패 이정재와 민족일보 조용수사장을 함께 사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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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가 끝난 며칠 후, 인솔자에게 안내가 어땠는지 물어봤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했다고 했다.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더 듣고 싶다고 하길래 다른 선생님들에도 들어보라고 했다. 안내하는 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러한 차이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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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서대문형무소



개화운동으로 투옥된 이승만대통령,

재임기간 가장 많이 사형시켜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개화・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성감옥의 전신인 전옥서를 시작으로 서로문감옥을 거쳐 서대문감옥에서 6연여의 옥고를 치뤘다. 이승만대통령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독립졍신'을 비롯하여 '한영사전' 그리고 여러 편의 논설을 썼다. 해방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두 번씩이나 서대문감옥을 시찰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에 그에게 도전하는 많은 정치범을 투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는 몇 명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승만대통령 12년 동안 집행된 사형건수를 보면 335명으로 월평균 2.4명을 사형시켰는데, 이는 월평균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승만정부시설 좌우익 대립과 친일파청산 문제 등으로 최남선 등 친일파들이 수감되기도 하지만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대립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친일경찰의 발호에 맞서 싸웠던 최능진은 친일경찰들과의 대립으로 권고사직당하고, 이후 선거에서 이승만의 선거구에 나왔다가 이승만세력의 방해로 후보등록이 무효화되고, 한국전쟁 와중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을 당한다.(1951. 2.11) 또한 대한민국 초대국회의 부의장과 이승만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간첩혐의로 처형하였다.




<경향신문 2009.10.11>




좌익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박정희대통령,

쿠데타 후 수많은 정치・사상범 사형시켜


박정희대통령 또한 자신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이승만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죄없는 많은 정치범을 사형시켰다.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남북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김구와 김규식 등의 민족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2개월 뒤에 여수와 순천에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대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없애는 숙군작업이 일어났다. 1948년 11월 박정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좌익혐의로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 박정희의 자백이후 군내의 만주인맥들의 구명이 이루어졌고, 그는 형인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사망하면서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으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승만정부에서 좌익혐의로 사선을 넘나들었던 박정희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4.19 당시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최인규내무장관과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 정치깡패두목 이정재를 사형시켰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괴뢰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해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받은지 넉 달만에 사형을 당했으며, 북한 지령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조종하고 국가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인혁당 사건 희생자 7명은 사형 확정된 지 18시간만에 사형 당했다. 박정희정권 기간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악연과 화해?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전두환 중심 신군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대통령은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또한 신군부가 집권을 하면서 김영삼대통령 또한 가택연금을 당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중형을 선고한 반면, 전두환정권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이 당선된 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해서 이들이 사면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김영삼대통령은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사면하고, 며칠 뒤인 12월 30일에는 231)명의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민간인 수백명을 죽인 권력자는 사면을 받는 반면 흉악범이라는 개인들은 조용히 사라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가?



1) 김삼웅은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의 ‘이승만과 서대문감옥’편에서 ‘우남(이승만)이 언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옥고를 치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무기로수 감형된 우남은 언제부터인지 서대문감옥으로 옮겨져서 비교적 수월한 옥살이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승만대통령은 1904년 8월 9일에 석방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은 1908년에 신축되었으므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함.

2) 정부수립이후 920명을 사형시켰다는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의 기록에는 김영삼정부에서 11명을 사형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기록간에 상이한 부분이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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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운찬 2009.12.22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지만... 생각해 볼 글이네요.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만행을 생각하며... 그런 만행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기억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화길라잡이로 활동하시나 보네요. 멋진 활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2. 연세대생 2011.11.2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년 이승만은 많은 교훈을 준다. 나중의 독재행적과는 구별되는...

  3. 까망가방하양필통 2016.08.28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와 글 잘 보고 갑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와서 다녀온 후기를 적으면서
    특히 해방후에 이런저런 사실들에 먹먹한 감 숨길수 없네요,
    여기 글중에 일부는 발췌하여 옮겨적습니다.
    원글 발췌한곳 분명히 표기하겟습니다.

초안입니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의 이해



서대문형무소는 역사의 축소판


서대문형무소는 그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일제가 1908년 경성감옥을 설립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형무소를 이전할 때까지 감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시대, 해방전후의 혼란시기와 군사독재에 대항한 민주화운동기까지 현대사의 격동기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좌우익 사상의 대립 속에서의 사상범 수용,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의 탄압 등이 자행되어 온 80여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역사 현장입니다.


의병전쟁과 서대문형무소의 신축


일제가 경성감옥을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을 들여 대대적으로 신축한 것은 일제가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강제 군대 해산으로 세력이 확장된 정미의병 등 조선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인 의병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의병전쟁 초기에는 의병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는 등의 학살을 일삼다가 국제적인 비난여론과 조선인들의 고조되는 반일감정을 고려하여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이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감옥을 설립, 증설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신축이 의병전쟁을 진압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의병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민병을 말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것이 조선인의 뜻이고 합법적인 것이라고 강변했지만 수많은 의병들의 전투와 희생, 그리고 의병전쟁 중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옥사한 의병들의 존재는 일제의 주장이 명명백백한 거짓임을 살아있는 실체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제와의 병합에 일부 지배계급이 개인의 영화를 위해서 동의했을지는 몰라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중들은 온몸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의병전쟁은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의병전쟁과 민족적 각성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많은 의병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한제국 말기부터 나라를 뺏기고 3.1운동 이전까지의 의병전쟁은 이전 시기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의병의 주체와 성격이 의병전쟁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화해 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양반들 중심으로 의병전쟁을 진행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천민 출신의 의병장이 양반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였다고 하여 처형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병전쟁을 진행되면서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과 천민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실재로 많은 의병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의병들은 신분적 차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직업적 차이를 넘어서서 국권회복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를 지키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신분의 차이가 없다는 민족적 각성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처음에는 조선왕조를 되찾기 위한 복벽주의적 의병전쟁이 중심이 되었지만 운동이 발전하면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공화제적 나라를 세우는 의병전쟁으로 나아갑니다.


급기야 1917년 7월에는 국내외의 공화주의 및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대동단결선언’1)을 선포합니다. 이 선언은 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된 1910년 8월 29일, 즉 황제권의 소멸된 바로 그날이 민권이 발생한 날로서 순종의 주권 포기를 국민에 대한 주권 양여로 주장하면서 국민주권설을 제기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3.1운동


3.1운동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두 알듯이 일제의 통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녀노소, 각계 각층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한 전민족적인 항쟁이었습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개축공사중이었던 서대문감옥의 일본인 간수였던 가키하라 다쿠로는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교회당이나 공장에도 철망을 둘러서 감방으로 대용하는 궁책을 취했으나 흥분한 재감자 중에는 방안에서 큰소리로 독립운동의 연설을 하면 박수로 공명하고, 그 혼잡은 도저히 비유할 수 없는 상황이며 게다가 감옥의 앞과 뒤의 고봉에 독립운동가가 올라가서 낮에는 한국기를 흔들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서 재감자를 선동하는 일이 날마다 밤마다 한 달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가키하라다쿠로의 회고를 통해서 당시 서대문형무소의 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재개했던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수용인원보다 훨씬 많은 3천여명이 투옥되는 바람에 한 방에 40~50여명 함께 기거해야 할 정도로 감옥은 만원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혹독했고 그 만큼 조선민중의 독립의 의지는 강했습니다.


3.1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후 숨죽이고 억눌리고 살아왔던 조선민중들의 전민족적으로 일어서서 항거하면서 수많은 인명피해 등을 입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선 민중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립의 의지를 보이고 독립에 이르는 길에 대한 민족적 각성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척사위정, 개화운동, 농민민중운동 등 각종 민족운동의 흐름이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집니다. 그 흐름은 통일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3.1운동의 힘을 받아서 상해에는 임시정부를 세우고,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을 하고, 만주지역에서는 무장투쟁운동을 전개하는 등 이후 독립운동은 모두 3.1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3.1운동은 억압 받는 동포로서 새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의식의 각성과 이를 이룩하기 위한 각종 운동이 확대되는 계기가 됩니다.


민주주의 발전과 3.1운동


3.1운동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군주제를 부정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체택합니다. 공화제 대한 선호는 1917년 ‘대동단결 선언’을 통해서도 제기되었지만 3.1운동을 거치면서 평범한 국민들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1919년 3개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상해임정부가 수립됩니다.


민주공화정을 기초로 한 상해임시정부는 때로는 분열되고 약화되기도 했지만 정부를 수립하고 장장 27년 동안이나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27년간이나 유지된 임시정부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초대헌법에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헌법에도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난 2008년 광화문에 모인 촛불들이 상해임시정부 헌법 이후 계승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조문을 외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독립이란 바로 민주공화국을 세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과거 우리 조상들이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은 다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봤을 때 광복 후의 그 뜨거웠던 열기와 분열과 혼란에 대하여 우리가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기와 의지가 있었기에 분열과 분단, 그리고 전쟁과 독재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국가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근대화, 그리고 독립운동의 이해


많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단순히 국권회복운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독립운동이 단순히 국권회복에 그쳤다면 독립된 이후 군주제로 되돌아간 많은 국가들과 달리 임시정부수립부터 민주공화제를 천명하고 광복이후 수립된 정부에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했다는 점, 그리고 분단과 전쟁, 독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유래가 드물 정도로 짧은 시기에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통해서 단순히 국권회복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과정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발전시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민주화운동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란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이며,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치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3.1만세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합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해방후의 경제발전도 가능했습니다.


일제의 통치가 왜 잘못되었을까요? 일제가 고문 등에 의한 강압통치를 했다는 것은 하나의 표면적인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강압에 의해 탄압했다는 데 있습니다. 자유와 독립, 개인의 인권 등 근대사회로 나아가려고 하는 우리 민족의 노력을 총칼로서 막은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 통치가 잘못된 것은 그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이만열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철수와 영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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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전쟁기념관/오두산전망대에서 평화와 통일, 인권을 이야기 하는 평화길라잡이 5기를 모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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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길라잡이 활동]
- 매주 일요일 서대문형무소, 전쟁기념관, 오두산전망대를 찾는 시민들을 안내하는 자원봉사활동입니다.
- 역사, 평화, 인권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참여하는 소중한 활동입니다.

[평화길라잡이 5기 교육과 활동]
- 기본교육(1월~3월)→발대식→수습활동(3월~9월)→수료식→정기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 수료 정기 활동은 월 1회 이상을 기본으로 합니다.

[평화길라잡이 5기가 되려면 1]

*기본교육을 이수해야 합니다.

[교육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 토.일 추후공지
[교육장소] 대방동 여성플라자 2층 세미나실 (1호선 대방역 3번 출구 도보 5분)
[교육시간표]

구분

강의명

강사

일정

OT

오리엔테이션

서울KYC 사무국

1월14일(목)

공통

평화감수성&평화교육

이재영(KAC 평화담당간사)

1월19일(화)

역사를 어떻게 보고 기록할 것인가

이이화(역사학자)

1월21일(목)

1910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이해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1월26일(화)

조선독립운동의 이해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1월28일(목)

한국현대사_민주화운동의 이해

정해구(성공회대교수)

2월 2일(화)

[이야기나눔]
사형제도에 대한 오만가지 토론

평화길라잡이

2월 4일(목)

역사로 본 한국의 사형제도

국제엠네스티

2월 9일(화)

[답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박경목(서대문형무소관장)

2월21일(일)

[이야기나눔]한국전쟁에대한 기억

평화길라잡이

2월11일(목)

한국전쟁은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정해구(성공회대교수)

2월18일(목)

전쟁과사회_끝나지않은 전쟁과 남은사람들

김동춘(성공회대교수)

2월23일(화)

한국군대와 파병의 역사

섭외중

2월25일(목)

[답사] 전쟁기념관

섭외중

2월27일(토)

공통

대중앞에서 자신감있게 말하기

서울KYC 사무국

3월 2일(화)

평화길라잡이 활동의 의미

실습

현장실습1. 서대문형무소

평화길라잡이

3월 7일(일)

현장실습2. 전쟁기념관

평화길라잡이

3월14일(일)

 

[평화여행] 오두산전망대&파주일대

이시우(평화사진작가)

5월 중

 

발대식

 

3월27일(토)

*사정에 따라 교육 일정이 변경 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길라잡이 5기가 되려면 2]

[지원조건]
- (1월~3월) 기본 교육과정 이수 가능하신 분 (출석률80%)
- (3월~9월) 평화길라잡이가 되기 위한 수습활동에 참여 가능하신 분 (10회이상)
- 수료 이후 평화길라잡이로 월 1회 안내활동 등이 가능하신 분 (일요일 등)
- 서울KYC 정회원으로 가입 (회비납부 의무 - 매월 CMS자동이체로 5천원, 1만원 등)

[교육비] 10만원  / 신한은행 100-024-876626 예금주 : 서울KYC  (교육시작 후에는 환불되지 않음)

[신청기간]  2010년 1월 11일(월)까지 신청서 접수 후 선발 (40명 이하)
[신청방법]
① 참가신청서를 [다운로드]-작성,  이메일로 제출 (보내실 곳
apply@kyc.or.kr)



② 접수여부 확인 (사무국에서 이메일 발송 또는 확인 전화)
③ 서울KYC홈페이지 정회원가입과 교육비 입금
④ 사무국에서 확인 이메일 혹은 전화

[문의]
서울KYC 우미정 활동가 mjwoo@kyc.or.kr 전화 02.2273.2276.  팩스 02.2273.2249
[홈페이지] www.seoulkyc.or.kr / 평화길라잡이 카페 http://cafe.daum.net/skyc-peace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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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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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갔다왔다.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올해까지는 조경공사를 완료하고 내년에는 보안과청사를 복원한다. 내후년에는 유관순지하감옥, 취사장, 격벽장 등을 복원한다고 한다. 아래는 관련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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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건물 복원예상도. 현재 보안과청사는 외벽은 거의 마무리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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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사업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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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과 청사는 이렇게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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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지하감옥은 이렇게 복원공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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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장도 원형복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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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벽장도 원형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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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취사장터 복원공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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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취사장 복원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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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장이어서 그런지 지면이 그을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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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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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선으로 그어진 곳이 취사장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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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장터 복원공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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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취사장의 모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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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9명의 학생과 인솔교사 2명을 대상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안내를 했다.


그 동안 몇 번 시민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했지만 그때는 수습안내였고, 이번달부터 정식으로 시민대상으로 안내를 시작하는 달이다. 원래 내 안내일은 8월 23일이다.

안내를 맡게 된 것은 미디어법과 관련이 있다. 나는 미디어법이 통과된 후, 일종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공황상태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뭔가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할 자신은 없었다. 그때 우리 평화길라잡이 까페에 단체안내를 신청한 글을 보았고, 혹시 안내할 자원활동가가 정해지지 않았으면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서울KYC에서 흔쾌히 고맙다면서 안내를 부탁했다. 휴가철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안내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던 것 같다.(미디어법과 서대문형무소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나는 단지 그곳에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론 구체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덜컥 안내를 하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첫안내인데가가 30명이 넘는 인원을 안내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엄청 부담이 되었다. 특히 안내를 신청했던 선생님이 직접 우리 평화길라잡이 게시판에 글도 쓰고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탁을 하니 배운대로만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공사중이어서 전시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안내가 가능했던 보안과청사가 복원공사로 출입이 불가능해지면서 주로 옥사에서만 안내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곳에서만 안내를 하다보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무엇보다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안내자가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일단 안내매뉴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숙지하고, 내가 관심있는 주제는 따로 정리를 했다. 크게 서대문형무소의 소개, 그리고 독립운동, 평화, 감옥과 인권의 분야로 정했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개념이 같다는 전제속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했다. 기본적인 카테고리를 이렇게 정했다. 

  • 서울KYC의 평화길라잡이 소개
  •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와 건립배경
  • 일제하 독립운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우리에게 감옥이란 무엇인가?
  • 평화, 그 기억의 방식
  • 우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또한 예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해서 서대문형무소(정확하게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하기 전에 벽에 남아 있었던 낙서 등의 사진과 수형자들의 감방생활, 그리고 대표적인 수감자 맞추는 퀴즈를 준비했다.

그리고 안내하기로 한 4시보다 두시간 빠른 시간에 역사관에 도착해서 사전 답사를 했다. 역사관에 들어선 첫 느낌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역사관에 들어가는 길에 한 부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공사를 하면서 개방을 해도 되는지 불만이있었다. 관람객을 안내하는 사무실과 자원봉사실 등은 콘테이너로 임시로 만들었고, 역사관 곳곳은 공사중인지라 시뻘건 황토빛으로 가득했다. 또한 여기저기 벽돌 깨는 소리와 포크레인 소리로 어지러웠다. 원래 보안과 청사에 있던 민족저항실 등의 안내내용은 12사로 옮겨져 있었고, 보안과 청사 지하에 있던 고문실의 내용물은 11사의 감방에 옮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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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는 공사중....


 
여름방학이어서 그런지 단체관람객이 많았고 개인관람객도 많았다. 형무소 복도는 바깥보다 훨씬 더웠고 관람객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한바퀴 둘러보면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설명할 것인지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실내에서는 전시된 내용물 중심으로 안내를 하고, 내가 생각하는 안내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여유공간이 있는 실외에서 하기로 했다. 다만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국권상실에서 해방까지 포함)은 12사의 판넬을 이용해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역사관내부가 시끄럽고 혼잡한 관계로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역사관 바깥의 정문앞에서 하기로 했다. 또한 이렇게 날씨가 더운 것에 착안을 해서 관람객 30명이 함께 감방에 들어가서 실재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더위에 시달렸는지 함께 체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 감방 하나에 최대 몇 몇까지 들어가 있었는지 미리 학예사에게 물어봤다. 학예사는 기록으로는 없지만 증언에 의하면 최대 40명에서 50명 정도가 한 감방안에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관람객들은 길이 막혀서 10여분 늦게 도착을 했고, 역사관 입구에서 기가폰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자원해서 역사체험을 왔기 때문인지 대체로 안내를 잘 따라주었다. 30명 이상이 함께 감방안에 들어간 후 재소자들의 감방안의 생활을 알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감방안에 30명 이상이 들어서자 열기가 달아올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몸으로 느낀 것이다.

13사인 공작사를 나온 후 고문을 재현하는 방식의 전시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공작사 주변은 30명이 함께 있을 공간이 없어서 부득이 좀 더 걸은 후 우물 주변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잘 집중이 되지 않았고, 내 이야기도 두서가 없어서 전달이 잘 안되었다.

사형장에서는 관람객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고, 나는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재미있었던 것은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절반 정도 손을 들더니 나중에는 전부 사형제에 찬성하는 쪽에 손을 들었다.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인솔교사 2명과 안내하는 나뿐이었다. 결국 사형제 찬반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데 사형이 악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유관순열사가 고문을 받았던 여사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일제가 나쁜 것은 고문을 해서 나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악독하게 고문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하고, 결국 일본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면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잘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 민주주의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독립을 쟁취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점, 우리 국민들의 일제의 억압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자유와 행복,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워왔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다는 점, 결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로 안내를 마쳤다.

관람객들이 얼마나 내 안내에 동의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안내를 하면서 나름대로 소통을 하려고 노력했다. 솔직한 관람객들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다음에도 더 준비를 잘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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