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서울KYC 평화인권 시민교육

일제강점기 직전부터 100여년 근현대사를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기회!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
평화길라잡이 8기 교육에서 만나보실까요?

평화길라잡이는
매주 일요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설하는 자원활동가입니다.

평화길라잡이 기본 교육을 수료하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들에게 해설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역사, 평화, 인권에 관심있는 여러분~
근현대사 100년!!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실천하는 '평화길라잡이8기'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 평화길라잡이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근현대사의 올바른 진실을 배우기 위한 강의와 답사에 참여합니다.
-매주일요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해설하는 자원활동가입니다.
-민주화운동 역사의 장소인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 활동을 준비하고, 정기활동을 합니다.  

2. 교육신청 안내
-모집기간 : 2014년 12월 4일(목) ~ 2015년 1월 8일(목)
-모집인원 : 40명
-모집대상 : 만 19세 이상/ 서울KYC 활동목적에 동의하고 평화, 인권, 역사에 관심있는 시민누구나
-접수방법 : 이메일(apply@kyc.or.kr) 또는 구글신청서
-교육생발표 : 2015년 1월 9일(금) / 홈페이지 교육생 공지, 개별 문자 통보
-교육생등록 : 2015년 1월 9일(금)~1월 13일(화)  
-교육비 : 12만원  [신한은행] 100-024-876626 예금주 : 서울KYC  
(교육시작 후에는 환불되지 않음)
*신청서 다운로드





3. 교육수료 및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안내
-기본교육 과정 중 출석률이 80% 이상 되어야 수료할 수 있습니다. 
(실내강의와 현장답사 포함  4회 이상 결석시는 활동자격 제한)
-기본 교육 수료자에 한해서, 평화길라잡이 안내활동 자격이 주어집니다.
단, 안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습활동을 해야합니다.

-수습활동 과정 : 3월~8월 약 6개월
기본교육 과정 이수 후 6개월의 수습활동 기간 중 10회 이상
(매뉴얼작성, 시연, 시민안내 및 모니터링)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수습활동 기간 중 활동 횟수가 10회 이상 경우에만 평화길라잡이 신분증 수여)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때부터, 서울KYC 회원이 되어야 합니다. (CMS 월회비 납부 의무있음)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수료 이후에는 월 1회 이상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4. 평화길라잡이 활동기간 중 혜택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신분증 발급
-자원활동 확인서 발급
-서울KYC 정회원으로 각종 활동 프로그램 참가 우대
(근현대사 아카데미, 동아시아 역사이해를 위한 일본 평화여행, 중국평화여행,
600년 역사도시 걷기 시민강좌 등)

5. 문의 서울KYC 사무국
(전화 : 02-2273-2276 또는 02-2273-2206/  seoulkyc@kyc.or.kr )

6. 주최.주관 : 서울KYC(한국청년연합)
   후원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7.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8기 기본교육 안내

 ◎ 강의 시간 : 평일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 토요일 : 별도 표시
 ◎ 실내교육장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의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도보 3분)
 ◎ 주최 : 서울KYC(한국청년연합)     후원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8. 교육장 안내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실내교육장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의실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 현저동 101번지

◎ 교통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출구 도보3분
 -버스 : 현저동 또는 독립문 정류장 하차
*간선버스(파랑) : 471, 701, 702, 703, 704, 720, 752
*지선버스(초록) : 7019, 7021, 7023, 7025, 7712, 7737
*광역버스(빨강) : 9701, 9703, 9705, 9709, 9710, 9711, 9712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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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25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This Is How a Prisoner of War Feels About Torture

Stephen Morton/AP

The release of a Senate report on the CIA's former interrogation program brought both political division and shock on Tuesday. While the shock was more universal, the division fell mostly along partisan lines with one notable exception: Senator John McCain.

In a nearly 15-minute speech from the Senate floor, McCain offered what is arguably the most robust defense so far of the report's release, referencing his own experience as a prisoner of war in Vietnam and rebuking his Republican colleagues by endorsing the study's findings.

It is a thorough and thoughtful study of practices that I believe not only failed their purpose—to secure actionable intelligence to prevent further attacks on the U.S. and our allies—but actually damaged our security interests, as well as our reputation as a force for good in the world.

His longtime amigo Senator Lindsey Graham was one of many politicians and intelligence officials to say that the report—which contained graphic accounts of physical and psychological abuse—could damage American interests abroad and that the timing of its publication was "politically motivated."

"The timing of the release is problematic given the growing threats we face," Graham said on Tuesday. "Terrorism is on the rise, and our enemies will seize upon this report at a critical time. Simply put, this is not the time to release the report."

McCain responded directly to the claim. He condemned the use of misinformation to garner support for past CIA practices and linked this history to the current campaign to keep the Senate report under wraps. "There is, I fear, misinformation being used today to prevent the release of this report, disputing its findings and warning about the security consequences of their public disclosure."

But most poignantly, McCain spoke of his own five-and-a-half-year captivity in Vietnam to argue that torture fails to yield credible information.

"I know from personal experience that the abuse of prisoners will produce more bad than good intelligence. I know that victims of torture will offer intentionally misleading information if they think their captors will believe it. I know they will say whatever they think their torturers want them to say if they believe it will stop their suffering."

McCain added (emphatically) that "the use of torture compromises that which most distinguishes us from our enemies, our belief that all people, even captured enemies, possess basic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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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8월 24일) 금정굴의 신목을 옮겼다.

신목이란 말 그대로 신의 나무라는 뜻인데 샤머님즘에서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 나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오색 댕기를 매어 둔 나무를 말한다. 


2000년 고양금정굴공대위를 확대개편하면서 매년 위령제 즈음 조형물을 세웠는데 2002년에 '산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를 세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신목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방부처리를 하면 되지만 환경오염을 시키기 때문에 방부처리를 지양하다보니 썩어가면서 안전상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어서 이번에 옮기게 되었다.


이번에 옮긴 신목은 고양시 수장고로 옮겨서 보관하게 된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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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3일(토)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가 주최하는 항일역사유적지 탐방을 갔다왔다. 지난 6월 21일 고양지역의 항일역사유적지 탐방에 이어 두번째로 이번에는 파주지역의 항일유적지 탐방이다. 나는 지난번 탐방에는 가지 못했고 이번에 참여하게 되었다. 


파주지역항일유적지탐방지역. 자료집까지 꼼꼼히 만들었다.




파주 통일동산 옆에 있는 장준하선생묘역


장준하선생묘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사무국장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설명해줬는데 친일로 들어서는 계기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시기로 나눠서 볼 수 있다면서 대부분의 인사들이 친일로 들어서는 계기가 태평양전쟁이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누군가는 일본의 패망을 보았는데, 누군가는 한민족의 독립의 불가능성을 본 것이다. 



민족화해센터 참회와 속죄의 성당. 남북한이 함께 만든 성당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참회와 속죄의 성당 영상(영상이 안보이시는 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aTjadj56P4c 






한글학자 정태진 선생 생가


강란숙시인이 이기형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습니다.


시를 낭송중인 권옥희시인



파주의 3.1만세운동 기념비




파주자원봉사센터장인 김영선소장님은 파주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발굴하고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광탄면사무소에 있는 3.1 독립운동 발상비



독립운동가 심상각선생의 손자인 심재만선생이 심상각선생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심상각선생의 묘소입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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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KYC주최로 ‘동아시아史 이해를 위한 중국평화여행_상해, 항주, 남경에서 생각하는 역사 그리고 평화’(후원 동북아역사재단)라는 매우 긴 제목의 긴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여행을 생각할 때는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가는 여행으로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2011년 심양과 대련, 단동을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을 준비한 쪽에서 너무 완벽하게 준비를 한 반면, 우리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너무 편하게 갔다 온 기억이 났다. 준비해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은 컸지만 편한 만큼, 준비하지 않은 만큼 남는 것도 많지 않았다. 2012년과 2013년 일본 평화여행을 다녀올 때는 사전에 공부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항상 사람을 만나고 왔고 그런 만큼 감동과 배우는 것도 컸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유적지만 방문하는 것이어서 걱정이 컸다. 중국사회는 민간영역은 있지만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단체나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의 김구선생 집무실


다행인 것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정책실장님이 동행을 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평소처럼 너무 어렵게 설명해 줄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했다. 나는 중국 가기 전에 진행한 1차 교육을 참석하진 못했고, 2차 교육만 받았다. 1차 교육에서 박한용실장님이 권장한 책들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자동선생의 ‘임정의 품안에서’와 그의 어머니인 정정화선생의 ‘장강일기’, 그리고 김학철 선생의 ‘최후의 분대장’과 이원규선생이 쓴 ‘약산 김원봉’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와 김학철선생의 ‘최후의 분대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분 모두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알려주셨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와 상해 임시정부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를 읽으면서 의외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국제정세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상해임시정부는 왜 외교노선을 주축으로 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일정 정도 해소되었다. 임시정부가 만들어 진 것도 제1차 세계대전이후의 국제정세와 관계가 깊고, 이후의 침체를 겪지만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흥의 김구선생 피난처



이번 여행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중에 상해와 가흥, 항주의 임시정부청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곳을 견학을 했다. 상해의 임시정부청사는 좁은 공간에서 관람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현지 안내인의 무성의한 안내만 따라다니면서 듣다가 순식간에 출구로 나와 버리게 되는 상황도 당황스러웠다. 잔뜩 기대하고 간 상해 임시정부터였는데 많이 아쉬웠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임시정부 터라면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가흥과 항주의 임시정부 청사 터와 임정 요인들 거주지도 둘러보았는데 가흥의 김구피난처와 항주의 임정유적지는 보전이 잘 되어 있었다. 가흥의 김구선생 피난처가 효성그룹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점과 항주의 임시정부유적지가 복원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완결성이 높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다만 짧은 시간이어서 충분히 기념관의 내용을 보기에는 어려웠다.

귀국 후에 항주의 임지정부기념관의 판넬을 스마트폰으로 전부 찍은 것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2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체제 재정비,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1933년 5월 김구와 장개석의 회견, 1934년 8월 한중합작 군사양성,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 10월 가흥 남호에서 선상회의를 통해 조직정비, 11월 한국국민당 창당 및 이후의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의 각 세력들이 통합을 위해 노력한 과정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항주의 임시정부청사 터


비용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미리 답사를 갔었다면 어떤 곳에서 오래 머물고 어떤 곳에서는 장소만 확인하고 가는 방식으로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사실 상해의 임시정부터는 확인만하고 항주의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이번 여행을 통해서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전에는 임시정부가 안창호선생 중심의 체제였다는 점, 그리고 윤의사의 의거로 안창호선생이 체포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다니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김구선생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리더쉽이 형성되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과 조선의용대

김학철 선생의 ‘최후의 분대장’을 읽으면서 조선의용대와 김원봉선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소 백범 김구선생보다 현상금이 많이 걸린 분이고 사회주의적 경향의 독립운동가로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김학철선생의 ‘최후의 분대장’과 이원규씨가 쓴 ‘약산 김원봉’을 읽고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선생이 민족혁명당 창당대회를 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당



김학철선생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당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운동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박한용실장님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환상을 갖거나 독립운동을 영웅시하는 것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방문한 곳은 대부분은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곳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유적은 아직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복원이 되었고 많이 알려졌지만 약산 김원봉 선생 유적은 따로 없다. 임시정부기념관에서 판넬 하나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백범 김구선생보다 약산 김원봉선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약산 김원봉선생의 노선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노선이라고 본다. 약산 김원봉선생의 의열단활동은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 준비론과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다르고, 당장 무력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독립론과도 다르다. 당장 무장독립을 하자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군대조차 제대로 보유하지 못한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의열투쟁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은 의열투쟁에 최선을 다하고 그 운동의 한계에 봉착해서 군대를 양성해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당정부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조선의용대까지 조직하게 된 것이다. 국민당정부의 황포군관학교는 제1차 국공합작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의 좌우합작이 독립운동의 좌우합작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조선의용대원들이 화북으로 떠날 때 약산 김원봉선생이 함께 가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직접 일제와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정부라는 틀 속에서 군대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남경의 이제항 위안소 터


이번 여행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 관련 유적지는 남경의 금릉대학이 전부였던 것 같다. 약산 김원봉선생은 베이징과 상해, 남경에서 주로 활약했는데 아직까지 관심도 적고,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아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약산 김원봉선생을 사회주의자로 보든 또는 민족주의자로 보든 그 시대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혁명과 독립운동

이번 여행지 중에는 중국혁명운동과 관련된 곳도 방문하였다. 손중산고거, 로신기념관관, 송경령기념관(만국공묘), 저보성기념관 그리고 남경대학살기념관을 방문했다. 손문은 신해혁명을 일으켜서 삼민주의로 중화민국을 건국한 사람이다. 손문은 광동성에서 호법정부를 세울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준해 준 사람이다.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애를 써 주었다. 저보성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을 일으킨 혁명원로로 백범 김구가 도피생활을 할 때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장제스는 윤봉길의사의 의거이후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도와주었다. 중국의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손문선생의 옛집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이 독립운동을 하는 지역의 특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운동과 함께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일부는 중국 공산당의 남창 봉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독립운동에 전력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중국의 혁명운동에도 참여하는 것이 올바르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량상 맞느냐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백범 김구선생과 약산 김원봉선생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분열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약산 김원봉선생은 화북으로 동지들을 떠나보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적을 떠나 인간이 각종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같은 이상이 있었기에 함께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또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물론 여전히 잘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국제정세를 절대 도외시 했서는 안된다는 점을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누가 더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느냐보다는 어쩌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어야 했느냐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힘이 있든 없든 생각이 같든 다르든 적어도 대외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정부를 유지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상해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선생의 완고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연합국의 일원이 되려고 무던히 노력한 점들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나라를 잃는 과정을 보면 처음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었고, 러일전쟁으로 조선이 의존했던 러시아도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영일동맹과 미-일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독립은 그 반대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어느 나라도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이 우호적으로 지원해줬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끝내는 내부의 이질성을 담아낸 통일전선 정부를 만들고 유지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해방후의 갈등속에서도 분단과 전쟁을 막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어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의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남경대학살 기념관의 아쉬움

마지막으로 남경대학살기념관에 가서 느낀 점을 적어 본다. 규모의 어마어마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기념과 2층에서 본 판넬의 내용이다. 판넬에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0여년의 역사에서 일본은 침략만을 했을 뿐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박한용실장님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근대역사는 침략의 역사였다는 내용의 전시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즉 근대 중국에게 일본은 침략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처럼 침략자이지만 물질적 근대화의 초석이라는 양면적 인식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중국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근대 아시아에서 일본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은 무엇이었을까? 나 스스로에게 우리들 스스로에게 던져 보고 싶다.​

남경기념관. 내부의 전시내용보다 외부의 전시물이 훨씬 와닿았습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서 느낀 아쉬움도 있다. 1층의 전시실 마지막의 에필로그 판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We should not forget that small and weak nations will always be bullied and invaded by powerful nations' 결국 힘이 약하면 강대국에게 침략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놀라왔다. 또한 난징대학살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단지 힘이 없어서 당했으니 힘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주의만은 아니라고 본다. 침략자라고 다 일본처럼 학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전쟁자체가 학살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전쟁이 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관 내에 써있는 마지막 결론. 힘을 키우자?



여행은 식사와 같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편한 사람과의 식사가 아니면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듯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가진 여행이라도 동행자가 불편하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다. 식사의 내용이 부실하더라도 편하고 좋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천천히 음식의 맛을 느끼면서 수다를 떨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식사를 한다. 하지만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하면 할 말도 없고 그저 먹는 것만 생각하고 빨리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번 여행은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해서 좋았다.


서울KYC평화길라잡이 이재정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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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린 "청년에 의한 지속적 대화의 공간, 그리고 새로운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재일-일본 유스링크' 행사중 세번째 필드워크인 '역사인식과 민주주의'팀에서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을 때 안내설명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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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이재정

1.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소개

서울KYC는 평화와 인권의 눈으로 서대문형무소, 전쟁기념관, 오두산전망대를 안내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저희는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1시30분, 2시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안내를 합니다. 대부분 대학과 직장을 다니고 있는 청년학생들이 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요 

이 곳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준공되었습니다. 이후 이름은 자주 바뀌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형무소를 이전할 때까지 감옥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기간을 따지면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셈입니다. 이곳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잃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선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후 분열과 전쟁을 겪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한 민주화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입니다. 

2010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동안 독립운동의 성지로서의 위상만 갖고 있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재개관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지배와 저항이라는 독립운동의 개념에서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이라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함께 공유하는 가치지향을 갖게 됩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잘못된 역사를 직시하고, 독재정권의 반인륜적인 탄압을 반성하면서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는 균형 잡힌 역사관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가 일제시대뿐만 아니라 해방이후 민주화된 시기까지 정치적 격변기의 산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전시 내용에 있어서도 민주화운동 관련 부분이 보강되었고, 11사에는 독립민주인사 풋프린팅 기념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민주화운동 관련해서는 전시된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점입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이러한 전시내용의 변화는 큰 틀에서 봤을 때 한국민주화운동의 성과가 뒤늦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최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유신의 추억’ 등 기획전시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3. 서대문형무소의 시설배치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지을 때 480평 규모에 500여명이 수감된 당시 최대의 감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수감자들의 증가로 이후 증축을 거듭해 3000여명이 수감된 감옥으로 확대됩니다. 1987년 형무소가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문화적,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만 보존을 합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들이 남아 있는 건물들입니다.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서대문형무소 건물들을 복원해 전시시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크게 상설전시관과 옥사전시관, 야외전시관이 있습니다. 상설전시관 1층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 2층은 민족저항실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물 지하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지하고문실이 복원, 전시되고 있습니다.

옥사전시관에는 중앙사와 11사, 12사, 공작사 등이 있습니다. 중앙사는 형무소 조직기구와 감시도구, 그리고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 등 전반적인 형무소 생활을 전시하고 있으며, 11~12옥사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으로서 복원되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소자들이 군수품 제작에 동원되었던 공작사 등이 있습니다. 야외전시물로는 한센병사, 사형장, 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격벽장, 망루와 담장 등이 있습니다.


4. 서대문형무소를 만든 이유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입니다. 여기서 근대식이라는 표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의병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일제는 초기에는 의병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는 등의 학살을 일삼다가 국제적인 비난여론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인들의 고조되는 반일감정도 걱정거리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서대문형무소입니다. 즉 민간인인 의병을 즉결처형할 수 없으니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이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감옥을 설립, 증설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서대문형무소에서 최초로 사망한 분들이 의병입니다. 

즉, 서대문형무소를 짓게 된 것은 일제가 근대식감옥을 짓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짓게 된 것입니다. 이 곳의 건축양식을 보면 근대 서양의 건축양식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 투옥된 분들은 재판을 거쳐서 이곳에 수감됩니다. 하지만 근대식 건물안에서 근대적 재판을 통해 투옥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라는 서대문형무소는 사실 외양과 형식만 근대식 감옥일 뿐 철저히 식민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근대국가에서는 금지하는 일상적인 고문과 감시가 이루어졌고, 조선이 갑오개혁 때 폐지했던 태형이 부활했습니다. 일제가 말하는 근대화란 사실 이런 것입니다.

이 감옥에서 1930년대까지 600만 명이 수감되었으니 조선인의 1/3의 숫자가 수감된 셈입니다. 



5. 3.1운동과 독립운동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을 당한지 10년후인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일제의 통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녀노소, 각계 각층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한 전민족적인 항쟁이었습니다.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하고 45,306명이 체포되었는데요, 당시 조선의 인구가 2,000만명 정도였으니까 인구의 1/10이 참여한 대단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수용인원보다 훨씬 많은 3천여명이 투옥되는 바람에 한 방에 40~50여명 함께 기거해야 할 정도로 감옥은 만원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혹독했고 그 만큼 조선민중의 독립의 의지는 강했습니다.

3.1운동의  의의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후 숨죽이고 억눌리고 살아왔던 조선민중들의 전민족적으로 일어서서 항거하면서 수많은 인명피해 등을 입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선 민중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립의 의지를 보이고 독립에 이르는 길에 대한 민족적 각성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3.1운동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군주제를 부정하고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채택합니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후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국가를 건설하려고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대중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때의 정신은 헌법 전문에 실고 있고, 지금도 우리사회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6. 고문을 통해서 본 일본의 식민통치

몇 년전만 해도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제의 잔악한 고문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역사관을 관람한 이후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도 일본경찰의 고문하는 장면입니다. 고문의 방식도 여러 가지입니다. 물고문, 손톱찌르기고문, 비행기고문, 상자고문, 성기고문, 주리틀기, 벽관고문 등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일제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한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의 긍지와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고문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왜 일제는 고문을 했을까요? 왜 고문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고문을 하지 않고서는 식민통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통치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전국에 감옥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전국토가 감옥이 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문은 누가 할까요?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 고문을 합니다.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는 한국민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를 무력으로 막기 위해서 고문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 스스로 주인이 되는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강압에 의해 탄압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개인의 인권 등 근대사회로 나아가려고 하는 우리 민족의 노력을 총칼로서 막은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 통치가 잘못된 것은 그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이후 군사독재정권도 정당성이 없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국민을 고문했지만, 결국 자유와 평화를 바라는 국민의 힘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7. 과거사가 아닌 인혁당 사건

한국에서 서대문형무소 하면 독립운동가들이 떠오르지만 사실 이곳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인사들이 수감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요즘 한국은 대통령선거운동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과거사문제로 시끄럽습니다. 한 유력 대통령후보가 인혁당사건에 대하여 대법원 판결이 두 개가 나왔다면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하면서 과거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인혁당사건은 박정희독재정권 반대운동을 한 사람들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서 처형시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참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 철저히 조작한 사건으로, 대법원 확정판결 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교수형을 집행함으로써 제네바 국제법학자 협회에 의해서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날입니다. 2007년 이 사건은 법원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왼쪽의 조각상은 ‘인혁당 사형수상’입니다.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무표정한 눈으로 뒤를 바라보고 있는 이 조각상은 사형장 바로 앞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작품제목은 ‘과거, 오늘을 묻다’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없이 묻고 있습니다.


사실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해방후에는 친일파에 의해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기도 했고, 군사독재정권에서는 수많은 민주인사가 투옥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선생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이곳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기에는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간첩혐의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투옥되고 일부는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 김대중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이곳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한창인 1980년대에는 이곳에 민주화운동을 하가가 투옥된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고통과 희생속에서도 이 차가운 감옥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들의 희생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최근 인혁당사건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8. 인권의 바로미터 사형제

이곳은 사형장입니다. 모형이 아니고 실재로 사형을 집행했던 곳입니다. 1923년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건물입니다. 이곳에서는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각종 흉악범들이 사형을 당했던 곳입니다. 

한국은 사형제가 있나요? 일본은 어떤가요? 예. 모두 사형제가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은 지난 8월 3일 사형수 2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합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1997년 12월 30일 사형이 집행된 이후 지금까지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10년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나라를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라고 부릅니다.

전세계적으로 사형폐지국이 많을까요? 사형제가 있는 나라가 많을까요? 폐지국이 훨씬 많습니다. 동아시아와 중동, 미국의 일부 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형제를 폐지했습니다. 

유럽의 EU라고 아시죠? 거기에 가입하려면 사형제를 폐지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2007년 한국이 유럽평의회에 ‘범죄인 인도와 사법공조 협약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사형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경험도 있습니다. 지난 3월 일본이 20개월만에 사형집행을 재개하자 유럽연합은 사형을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인류 존엄을 위해 금지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서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법무부 장관은 흉악범이 사형으로 죄의 댓가를 치루게 해야 한다는 일본 사회의 절대적 지지에 부합한다고 밝혔습니다. 한국도 최근 사형재개에 대한 여론이 높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형찬성론자들은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합당하는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사형에 찬성하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오판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군사독재정권 시기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형을 악용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한국이 민주화되기 전까지 사형수의 30%가 정치범이었습니다. 


9. 감옥이라는 것에 대해

○ 중앙사
이곳은 중앙사는 곳입니다. 감옥의 중앙에 있어서 중앙사라고 부르는 곳인데, 간수들이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건물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곳에서 봤을 때 왼쪽부터 10사, 11사, 12사입니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요? 한꺼번에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곳에서 몇 개의 건물에 수용되어 있는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채꼴 모양으로 감옥을 지은 것입니다. 이런 구조를 판옵티콘 형식이라고 합니다. 근대식 감옥은 수형자에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과 중앙의 감시탑에 의해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수형자들이 서로 차단된 채 고립되어 있고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한 눈에 모든 수형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 독방
빛도 들어오지 않는 한 편도 안되는 이곳은 독방입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주로 독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독방이 매우 많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사상범이었기 때문에 주로 독방에 가뒀고, 일제시대 신문을 보면 독방을 신축했다는 기사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해방이후에도 크게 나아지 않아 어떤 민주화운동가는 독방을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관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 감옥의 일상
- 감시구, 패통, 3중장치의 문
- 12명 정도 잘 수 있는 공간에 30~40명씩 수감
- 감옥의 계절과 인권(여름이 좋을까? 겨울이 좋을까?, 응보주의 대 교화주의)
- 감옥의 생활(지루한 일상과 답답함. 장기판, 벽면의 낙서들) 


10.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매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입니다. 그 동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운동만을 기억했습니다. 독립운동 중에서도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배제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만을 기억했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 중에서도 고문을 주로 부각했고, 이러한 고문에 맞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애국지사들을 조명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도 기념을 하고,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도 균형을 맞춰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자극적인 고문만을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것은 한국사회 민주화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피해자로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익숙합니다. 한국은 일제의 폭압통치에 맞선 피해자로서의 자랑스러운 역사에만 경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의 역사와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단일한 정부를 만들지 못해 해방이후 분단으로 전쟁까지 치른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식민통치에 대해서 모른 체 하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당한 피해만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러운 역사, 피해자로서의 역사에서 기억되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상대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고통스럽고 불편한 역사를 기억할 때 상대가 보이고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운동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일본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그런 참혹한 과거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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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박종철기념관의 소개글


"지난 군사독재정권 시절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 받고 특히 박종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상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을 때, 과거의 고문 조사실 등을 역사의 진실로 보존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히 전개된 바 있었습니다. 이를 게기로 과거사 조사위원회, 시민 위원회 및 박종철 기념사업회 등이 참여한 위원회를 거쳐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509호 조사실의 복원 및 박종철 기념전시관의 건립이 결정되었으며, 박종철 사망 30주기인 지난 2007년 1월 기념관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http://cafe.daum.net/parkjc8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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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치바로아카데미'는 진보신당 서울시당선거의 후폭풍으로 출석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른바 통합파로 불리는 유의선후보와 최선후보가 시당위원장 후보로 출마했고, 이 중에 한 명은 떨어지고 한 명은 당선이 되었다. 이 때문인지 출석률이 저조한 가운데 청바지에 대충 상의를 차려입은 풍체가 풍성한 남성 하나가 정치바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강사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허가를 받은 수강생도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번 강의는 지난번 임동원 전 장관 특강처럼 일반인이 꼭 듣고 싶은 강의도 아니기 때문이다.(지난번에 임동원 전 장관 강의때 전체의 동의를 얻어 한 분이 특별히 강의를 들은 적은 있다. 정치바로 강의는 미리 등록하고 돈내고 들어야한다. ). 미리 강의원고를 받았는데 너무 어려워서 읽기를 포기하고 왔고,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강사냐고 물어보니 강사라고 대답했다. 뭐 그런가보다했다...

정치바로아카데미에서 '대안분과'에서 강의중인 홍기빈소장. 홍기빈소장은 mbc 라디오에서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고 있다.그리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라는 어마어마한 연구소도 운영중이다




출석률이 저조한 가운데 강의는 시작됐다. 그런데 강의는 생뚱맞게도 정치바로 사무실이 있는 주차장거리에 기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치바로에 처음 왔을 때 주차장거리가 궁금해서 물어봤고, 어느 누군가가 예전에 당인리발전소까지 기차가 다녔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기차가 다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강사는 기차선의 유래에 대해서 자세히, 그것도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면서 자세히 설명했다. 주차장거리의 기차는 1930년대까지 경성에서 한강으로 옮기는 물류의 중심이었고, 이제 역사속에 사라지려고 하는데 경제라는 것도 그런 것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끝날 때까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암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으로 보인다. 경제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 바로 그거라는 거고, 거기에 무슨 이념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경제에 대한 좌파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능을 비판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강사는 진보세력이 혁명이냐 개량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하지만 정작 경제정책에 있어서 무능하다고 말한다. 즉 경제문제는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인데 그것에서 혁명이냐 개량이냐는 이데올로기적 논쟁이나 하면서 경제정책을 우파에게 맡겨두고 있다는 것이다.



강사의 핵심적인 주장은 경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는 것이다.(나는 이 말이 충격이었다. 어떻게 생각이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지????) 신자유주의자들과 맑시스트들이 경제를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두고 비판을 가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는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머리속에서나 가능한 시장을 신성화시키고 여기에 현실을 억지에 대입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예된 혁명에 기다리며 경제문제는 마치 자신들이 개입해서는 안되는 문제로 보고 외면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좌파에 있어서는 한쪽에는 언젠가는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고 믿는 혁명적 그룹과 자본주의를 조금씩 고쳐가면서 쓰자는 개량주의자들의 있지만 혁명주의자들은 현실문제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개량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정당과 경제정책에서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사에 의하면 이러한 혁명파와 개량파의 갈등과 한계를 극복한 사례로 스웨덴모델을 들고 있다. 특히 에른스트 비그프로스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계급없는 사회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궁극 목표와 당면 정세에서의 구체적인 정책을 연결짓는 개념으로서 비그포르스의 '잠재적 유토피아(provisional utopia)에 착목하고 있다. 영어 그대로가 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즉 당면한 정치경제적 현실조건에서 실제로 그려볼 수 있는 실현가능한 사회적 모습을 말하고, 좌파가 먼 훗날의 혁명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타협주의적 경제정책이 아니라, 10년 또는 20년내의 사회를 미리 보여줄 수 있는 정책이나 비젼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 개량주의자로 비난했던 베른슈타인의 책이다. 지금도 구할수 있을까?

홍기빈소장이 극찬을 했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이날의 강의는 바로 provisional utopia에 사람들이 꽃히면서 흥미진진해졌다. 여전히 맑시즘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버리지 못하는 모씨는 점심을 먹으면서 심화학습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암튼 사람들은 또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문제는 정작 들어야할 사람들이 전날 뒷풀이에 지쳤는지 많이 못왔다는 점이다. 아마 나중에 후회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실 provisional utopia보다는 경제를 이데올로기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나, 비그프로스가 국유화를 반대했다는 점, FTA 또는 한미FTA, 그리고 삼성과 이건희에 대한 강사의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크게 다가왔다. 우리가 답을 다 알면서 애써 외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꼬챙이를 날카롭고 깊게 해서 찔러댔다. 그리고 지구적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좋았다.

많은 말을 쏟아냈던 오건호박사와 최은희 부위원장의 모습. 이 두사람이 사진에 나온 것은 순전히 내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한 것 같기는 한데, 뭐라고 할까 이런 것을 계속 느끼고 있다. 맑스 베버의 '직업으로의 정치학'과 세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그리고 홍기빈의 강의까지 뭔가 수미일관한 뭔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뭘까? 그건 강의를 들어보면 안다.


안 온 사람들 후회할 거다. ㅎㅎㅎ
난 강의도 좋았고 강사도 마음에 들었다.

혹시 정치바로아카데미에 관심이 있는 분은 아래 까페로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http://cafe.daum.net/politicsb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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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픈 요약

 

박찬표의 ‘한국의 48년 체제’(후마니타스) 는 후반부의 2장을 제외하면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핵심은 한국현대사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것을 주장하면서 해방후 3년의 정치적 활동과 그 결과가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구조의 기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 관점이란 하나의 가치나 이상의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실체로서의 민주주의’-이른바 국가의 주인이 정말로 국민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절차로서 정의하는 ‘절차로서의 민주주의’의 관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대립적 관점으로 보거나, 인과관계 또는 단계론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합해서 보고 있다. 이것은 민주화의 진전으로 형식적 민주화 또는 제도적 민주화는 진전되었으므로 이제는 실질적 민주화로 나아가야한다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다른 맥락이다.

 

저자는 최장집교수를 인용해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른 단계의 과제가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천한 효과로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를 하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정치적 대안의 범위를 정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선거와 관련된 모든 것이 갖춰져있다하더라도 유권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당을 투표용지에서 발견할 수 없거나, 그 정당의 활동자체가 금지되거나 제한된다면 실질적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국가형성초기단계(48년까지)에서 이미 좌파(노동)를 배제하는 보수독점의 정치체제가 들어섬으로서 국민의 정치적 이해를 실현할 있는 정치적대안자체가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미소냉전이라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강요되었다기보다는 당시 정치세력들의 정치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강대국에 의해 분할점령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분단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분단이 된다고 해서 외부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 좌파를 배제하는 정치체제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당시 국내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정치세력들이 이른바 ‘정치활동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상이한 이해와 가치를 갖는 여러 집단들 간의 갈등을 전제로 해,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수단적 틀’로서 규정되고 이러한 것이 서로 공유가 될 때 공동체는 유지된다. 그러나 당시 정치세력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누가 국가의 주도세력이 되어야하는가하는-를 고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틀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미소냉전 구도의 원심력에 의해 가장 극우적이고 친미적인 이승만정권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자기중심적으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던 좌우의 세력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과도한 민족주의 비판: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저자는 해방이후 각 정치세력들이 자기중심적인 국가형성투쟁으로 인하여 정작 중요한 국가형성의 정치규칙을 만들지 못했다면서, 이러한 것을 강화한 것이 민족주의의 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각 정치세력들이 민족주의를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활용함에 따라 오히려 갈등이 증폭됨으로써 민족주의가 애초에 지향했던 상태가 실현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애초 의도와는 달리 정치세력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분단을 기정사실화하였다. 결국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미군의 견제로 미수에 그친 반면, 김일성은 조국해방전쟁을 수행해서 민족주의의 극단화를 실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40여년 가까이 실질적인 임시정부조차 갖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한 민족이 민족주의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만약 민족주의적 가치를 배제한 정치운동을 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마당에 민족주의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보다는 분단체제를 받아들이면서 현실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들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10여년전만해도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통일은 당위였다. 하물며 해방당시 상황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주의라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은 통일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욕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조봉암과 같이 일찍부터 분단체제를 받아들이고, 그 조건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추구하는 노선이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적 가치를 추구했던 다른 노선이 부적절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사후적 평가일 뿐이다. 해방후 김구의 활동이 오늘날 봤을 때 지나치게 정파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나 지금이나 존경을 받는 것은 당시 민중들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오늘날 조봉암의 노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것은 단지 그의 노선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전쟁과 이후 수 십년의 분단체제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오면서 통일이라는 것이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조봉암의 신중함과 혜안이 돋보인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과정과 경험이 필요하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오스트리아의 각 정치세력이 갈등이 아닌 타협의 정치를 했던 것은 ‘자파의 독점적 지배만을 추구해 내란에 이른 결과 히틀러에 나라를 빼앗겼던 경험에 대한 반성, 히틀러에 저항한 동지 의식 등’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공존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론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한 경험과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부끄럽게도 제대로 된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대내적으로는 국민이라고 할 주체가 거의 없었고 대외적으로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각 정치세력들은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정치적 대안을 놓고 경쟁해본 경험도, 그러한 경쟁을 통해 파탄을 당해 공존의 정치가 필요함을 경험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한 경험을 해방과 함께 처음 해 본 것이다. 그러한 결과 해방이후 각 정치세력들은 민족주의담론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한 세력을 중심으로, 또는 생존의 필요에 의해 자신의 입장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애초에 서로간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표피적인 논리였을 뿐이다. 핵심은 각 정치세력들간의 경쟁을 평가하고 제도화할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분단이 되고 전쟁을 겪고 수 십년의 분단체제를 통해서 경우 민족의 반쪽에서만 민주주의에 대해서, 그것도 매우 부족한 민주주의를 통해서 서로 동의하기 어려운 신념과 가치를 지닌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법에 대해서 경우 터득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경험해보는 수 밖에 없다. 그 속에서 터득하고 살아가야 할 뿐이다.

 

민족주의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담론에 힘을 보태주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독재와 재벌에 대한 가장 거센 비판담론이 민족주의이기도 하다. 저자는 김구의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이른바 운동권들의 급진적인 통일운동에서 드러난 과다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핵심은 운동권이 냉전체제로부터 이탈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불임성’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공국가의 물리력과 반동화를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현대사가 끊임없이 냉전체제에 의해 희생당한 역사였지만, 또한 이러한 냉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는 점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장준하선생이 ‘모든 통일은 선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점이나 문익환목사, 김수경의 북한방문 등의 통일운동이 정세에 반동화를 가져온 측면이 있지만, 분단체제를 넘으려했던 그들의 운동자체 또한 역사적인 산물이다. 물론 오늘날 현실정치를 하는 세력이 사회운동세력과 같은 방식의 시대인식과 활동을 하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북한이 엄연히 우리의 북쪽에 존재하는 현실속에서 완전한 정치적 경쟁공간이 개방된다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문제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민주노동당이 성장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대안의 확장을 위한 진보정치의 상상력이 필요해

 

한편 현재 진보정치의 정체와 관련해서 저자는 노동의 정치세력화 실패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1987년 이후의 요인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산업화를 주도한 국가의 특징이 주조된 국가 형성과정으로부터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역사에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실천적 고민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효과가 있다. 가령 노동의 정치세력화를 가로막은 두 번째 요인으로 지목한 보수적 정당체제를 설명하면서, 개혁적 자유주의정부가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을 동맹으로 삼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적절한 비판이긴 하지만 설사 개혁적 자유주의정부가 동맹을 제안했다하더라도 진보진영이 이를 수용했을리 없다. 당시 여당이었던 개혁적 자유주의정당에 비판뿐만 아니라 진보정치 당사자들에 대한 비판도 필요하다. 현재 진보적 연립정권수립에 대한 논의자체가 진보진영에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 구조를 봐도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진보정치를 하는 운동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 대한 비판은 적절하다. 논쟁이 실질적 민주주의에만 맞추지만, 정작 실질적 민주주의에는 기여를 하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최장집교수의 표현처럼 실질적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른 단계의 과제가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천한 효과로서 나타날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정치영역을 넘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자기 심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을 통해서 정치적 대안의 확대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보진영은 실질적인 민주화라는 화두에 매달려 있다. 예를 들어 누구는 진보가 아니고, 통합의 대상에는 누구는 안된다는 방식이다. 어쩌면 경쟁의 룰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의 확장에 대한 논란이 훨씬 진보진영에게 중요할지도 모른다. 진보진영의 무능과 상상력의 빈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연립정권 논쟁도 의미가 있다. 연립정권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절차적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한 정치적 대안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웠던 점은 해방이후 소장파가 몰락하기까지의 역동적인 실재 정치현실에 대한 분석이었다. 특히 반공법 개정을 둘러싼 의회와 행정부의 공방과정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이 좁혀져서 보수 우파간의 권력 경쟁이 전개되었지만, 권력 상호간간의 견제로 인해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는 순기능이 발휘되었으며, 이것이 한국정치의 한 전형의 초기형태였다는 분석은 정치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보게 해주었다.

 

5.10 선거당시의 모습



또한 1947년 과도입법의원에서 우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좌파의 지지기반으로 여겨지는 사회하층 및 청년층들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여러 장치-예를 들어 선거권 연령 23세, 서명을 통한 유권자 등록, 자서방식의 투표, 월남인을 특별선거구-를 두었으나 5.10 선거를 앞두고 들어온 유엔 한국위와 미국의 개입에 의해 이러한 제한 장치는 모두 제거되었다. 아마 우파들의 주장대로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소장파들의 활동도, 역동적인 한국의 민주주의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자신들이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의 주장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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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권이 이야기하듯 진보신당이 "스스로의 물리력과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사실 그 동안 진보신당은 스스로의 물리력과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회찬, 심상정의 명망성에 기대 안일한 정치운동을 해 왔다. 그런데 그 명망가 중의 한 명인 심상정이 기존의 진보신당의 안일한 정치운동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기에 일부 당원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만약 진보신당이 스스로의 물리력과 기반을 갖고 있었다면 심상정이 그런 주장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그런 주장을 했다하더라도 당에서 바로 정치적 생명을 상실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진보신당이 독자적인 기반과 최소한의 물리력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심상정이 기존의 진보신당방식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는 이유도 진보신당이 자신만의 물리력과 기반을 갖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중권도 심상정을 심하게 비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경기도당의 심상정후보선본에서 일을 했다.지역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내가 느낀 것은 진보신당 경기도당은 당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선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는 점이디. 선대본 해단식에서 후보들과 간부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표현하지 못할 절망감이 들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내가 정확히 10년전에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에는 진보정당 10년의 역사가 제대로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물론 민노당쪽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포함해서 선거운동기간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 사수론을 외쳤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논리는 불가능했다. 사실 쪽팔렸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진보정당운동을 해왔으면서 고작 한다는 말이 진보정당 사수론밖에 없단 말인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식양당제로 갈 것인가, 아니면 유럽식으로 갈 것인가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대중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극소수의 진보학자들과 진보정당 지지자들에나 의미있는 말일 뿐이다. 실력없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자기방어논리일 뿐이다.

이번 선거를 돌이켜보자. 민주대연합이 문제는 아니다. 왜 우리는 진보정당 중심의 민주대연합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번 선거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는 것은 넌센스다. 반MB를 인정한다면 결국 민주대연합이다. 그 민주대연합에 진보가 중심에 설 것인지 자유주의자들이 중심에 설 것인지는 자신들의 실력에 달려있다. 그 민주대연합에 실력이 부족하다면 그 속에서 최대한의 진보의 가치를 지켜내고, 현실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반MB의 대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진보대연합을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바보가 아니다.  결국 국민들은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연합에 손을 들어주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진보신당으로 이명박정권에 맞서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합론은 배신도 아니고 단순한 정치공학도 아니다. 연합도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진보신당의 실력으로는 연합도 어려울 것이다. 최소한의 형식과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심상정징계결의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리더쉽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나는 징계에 동의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조소와 무시밖에 없다.


아무튼 정종권의 글을 읽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상과 현실속에서 고민을 제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발이 묶여 있는 것 같다.


[정종권] 이장규 동지와 저를 비판하시는 동지들에게 드리는 답변

 

 

0. 제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저를 실명으로 거론하여 비판적 의견을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제가 그 고민과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비교적 안면이 있고, 그 개인의견의 흐름을 알고 있는 이장규 동지에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이장규 동지, 지금의 이 논쟁은 작년 말부터 시작된 지방선거 관련한 선거전술과 진보대연합 관련한 논쟁으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핵심이 지방선거에서는 소위 5+4협상 관련한 3월 4일 중간합의문에서 폭발하였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5+4 협상이 당대회, 전국위, 당 대표단 어떤 단위에서 어떤 문구를 통해 결정된 조직적 결정이었는가를 따지는 논쟁이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표단 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협상에 제가 대표로 참여해왔습니다.

 

이 협상이 가지는 폭발성과 민감성을 저를 비롯한 대표단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5+4관련 협상 중간시점마다 당원 보고글을 작성하여 올렸습니다. 단순한 사실관계만 보고한 것이 아니라 저와 대표단이 어떤 맥락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견까지 포함된 보고 글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소통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당 게시판에 올렸습니다(지금도 ‘제다’로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그러나 이장규 동지를 비롯하여 많은 문제의식을 갖고 계시다는 당원들의 비판, 논박, 대안 등등의 의견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2월 21일 대표단 회의의 보고안건으로 올려서 각 시도당 공식 이메일로 보낸 ‘선거연대에 대한 당 지역조직 지침’이라는 문서에 대해서도 비판과 반박의견을 접해본 적도 없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비공개문서였지만 지금은 공개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판단 하에 그 문서를 첨부합니다.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맥락이 분명하게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파일로 첨부합니다)

 

 

1. 소위 진보대통합 시민회의(약칭 시민회의)는 정치활동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민회의의 흐름과 접한 것은 2010년 2월경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당 대표회담 등으로 진보연합의 방식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진보대통합과 복지국가라는 담론을 가지고 포럼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차례 토론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이후 포럼 관련한 회의가 있다고 하고, 정당 측에서도 당시 5+4 협상 관련자들 중 민주당을 빼고는 참석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참석하였습니다. 국참당에서는 김영대, 창조당에서는 유원일, 민노당에서는 이수호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포럼의 위상과 전망에 대한 토론이 있었는데, 저는 포럼이 진보대연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의 울타리나 우호적인 시민사회의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하고, 정당간의 관계는 1차적으로 정당들이 풀어가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대략 그런 의견이 다수의 의견으로 모아졌고, 그런 방향에서 포럼을 조직하는 과정에 발기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이 포럼 관련한 회의나 행사에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참여한 바가 없습니다. 국참당이나 창조당, 민노당에서도 그 이후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상현씨나 주대환씨 같은 분들이 지속적으로 포럼을 시민회의로 조직하는 사업을 진행한 것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의 대외협력을 맡고 있는 부대표로서 용산참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단식농성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세훈 서울시장 측근과 대화 및 협상도 하였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용산범대위와 함께 만나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민회의 관련한 흐름에 대해서 진보대연합 및 진보정당의 이후 문제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는 판단을 하여 토론 및 회의에 참여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진보대통합이라는 언어의 문제는 2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시민회의의 실체와 방향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2월경 내린 판단은 이 흐름에서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고, 우리와 무관하게 그 흐름이 형성되고 진행된다면 우려스럽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문제와 흐름에 대해서는 대표 및 대표단에 구두로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 다만 그 실체와 진로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표단에서 공식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저는 소위 진보대연합 또는 진보대통합에 대해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입장이 민노당은 적극적이고 진보신당은 소극적 방어적이라는 틀(프레임)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양당의 입장을 보고 진보신당을 압박하지만, 진보신당은 <선 통합선언 - 후 선거연합>이라는 민노당의 입장에 대해 <선 선거연합 - 후 단계적 단결(통합)강화>라는 입장을 가졌고, 이것은 진보대연합과 통합에 대한 일정과 로드맵의 차이이며 진보신당의 의견이 합리적 이성적라고 주장하였고, 지금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당의 입장에 근거하여 민주노총과 민노당의 의견과 논쟁하고 투쟁하였고, 각종 지면을 통해 의견을 밝혀왔다고 스스로 자평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장규 동지가 저에게 시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당발특위에 들어오라는 얘기는 전혀 논점이 맞지 않은 의견입니다. 이장규 동지는 기억하고 계시지요. 저는 작년 12월초 민들레포럼에서 소위 <신진보 통합정당의 3단계 과정>이라는 것을 개인의견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당게에서 논란이 되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저의 생각은 그 의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선거의 교훈과 반성문이라는 글에서 쓴 <당의 일체감과 통일성은 ... 진지하고 격렬한 당원들과의 토론 논쟁 소통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비판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격렬한 토론을 할 용의와 준비가 되어 있고 저의 의견을 몇차례 솔직하게 당원들에게 밝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저의 생각은 대표적으로 12월 민들레포럼에서 밝힌 <신진보 통합정당의 3단계 과정>이라는 글과 5월 20일 레디앙에 기고한 <반MB는 이미 하나의 정당이다(제목은 제가 붙힌 것이 아닙니다)>와 6월 17일 당게에 올린 <선거의 교훈과 반성문>이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는 것을 확인드립니다.

 

 

2. 사회당과는 연합하고 통합해야 하지만 현 시점에서 1:1통합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 시절부터 사회당과의 연대와 통합을 일관되게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사회당 행사에 민노당 관계자 중에서는 가장 활발히 참석하고 왕래한 사람입니다. 2007년 대선에서도 민노당 권영길 후보와 사회당 금민 후보의 단일화를 주장하고, 그것이 양당의 통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민노당 진보대연합 특위의 성원으로 사회당 책임자들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관련 협상도 진행하였습니다.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한 이후에도 사회당 지도부와 만나서 양당의 통합 등에 대해 요청하고 몇차례의 대화도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금민 전 대표와 안효상 전 부대표 등과 수차례 대화를 진행하였고, 진보신당의 수도권 광역단체장에 대한 공개 지지와 지역 후보들에 대한 지지 의견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당시 금민 전 대표는 현재 상황에서 사회당은 노회찬, 심상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하는 것은 사회당을 포함한 진보정치의 발전에 의미 있는 기여라는 자체 판단을 하였다는 점을 밝혔고, 이것이 은평 재선거에서 예비후보로 등록한 금민 후보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고마웠고, 저보다는 훨씬 많은 고민을 한다는 생각과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방선거가 끝났고 사회당은 6월 11일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 명의의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아래 구절은 그 입장의 결론 부분에 있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진보 진영은 대안적인 진보대연합을 구성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우선 진보 정치의 독자성을 분명하게 수립해야 한다. 이때 독자성은 완주니 아니니 하는 결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정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방식으로 진보대안을 민주연합에 관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진보정치의 독자성은 민주주의 운동 및 과제와 구분되는 독자성이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사회당은 민노당 못지않게 우리 진보신당에게 우당입니다. 진보대연합과 통합의 과정에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당입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사회당과 진보신당만의 1:1통합은 사회당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의미 있는 정치적 결합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장규 동지, 저는 지난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 10주년 행사에 진보신당을 대표하여 참석하고 발언하였습니다. 그 때 민주당, 국참당, 창조당, 진보신당, 사회당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발언하였습니다. 그때 사회당 최광은 대표가 한 말 중에 참으로 가슴 아프고 기억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회당을 창당하고 활동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이런 행사에 정식으로 초대받고 축하 발언하는 것에 10년이 걸렸다>는 구절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민노당의 책임있는 지위에 있을 때에도 사회당을 그렇게 소외시켰던 것입니다. 그 반성의 한 측면에 정치와 정당에서 자기 기반과 독자성을 갖지 못할 때 현실은 무자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진보연합과 신진보 통합정당을 주장하고 의견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을 갖지 못한 연합과 통합은 굴종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장규 동지는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합과 통합을 주장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3. 보수양당제로 가는 흐름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저지하고 막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방책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수 양당제로 한국의 정치지형이 굳어지면서 한국의 진보정당이 주변화되고 게토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레디앙에서 쓴 글의 주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MB연대라는 틀이 이미 하나의 당적 틀로 굳어지는 것에 대한 경계이고 비판입니다. 더불어 시민사회 일각의 민주연합론,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우경적으로 무력화되고, 한국노총의 정치방침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양당제 구도가 형성되어가는 과정과 유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장규 동지와 저는 진단을 비슷하게 하면서도 처방은 전혀 달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수양당제로 고착되어가는 한국의 현실 정치지형을 어떻게 저지하고 바꿔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전략전술이 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디앙에 쓴 기고글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 구절이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고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공조하면서 사실상 진보정당의 독자성을 훼손하고 진보정치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민주노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역사에서 퇴행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진보적 시민사회가 사실상 민주당 지지 활동을 하고 있다는것은 현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잘되었다. 저네들은 어차피 그런 세력이었다. 저런 세력과 공조는 안하는 것이 더 낫다. 오히려 진보신당의 입지가 넓어지고 독자 발전을 할 기회가 높아졌다” “애초에 저런 세력들과 무엇인가를 해볼려는 것이 문제였고 잘못이었다”라는 발상과 생각을 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남 탓으로 자신의 올바름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남 탓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진보정치의 발전과 성장을 도모하고 실천하는 것에는 그 발전과 성장에 우호적인 환경과 조건을 형성하는 실천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환경과 조건을 악화되는 것을 방관하면서 혹은 그러한 흐름에 삿대질만 한다고 해서 진보정치의 성장과 발전이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이 후퇴하고 민주노동당이 보수양당제 담론에 포섭되어가는 것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성장 발전을 가로막는 것만이 아니라 진보신당의 성장과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들의 위기는 우리의 기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위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지방선거의 성적표가 어떠하든 이러한 환경과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것이 지방선거 이후 진보정치의 전략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4. 소위 국민참여당 참여와 배제 논쟁의 의미는 진보정치의 지지 기반을 어떻게 확장 확산해낼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장규 동지, 두가지 논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성에 기반하여 연대연합을 유연하게 하자는 말과 연합과 통합의 대상을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의 논점 말입니다.

저는 진보신당만의 성장 발전이든, 진보정치의 연합과 재편을 통한 발전이든 그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논의해야 하고, 저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물론 전제는 위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자신의 물리력과 기반에 근거하지 않으면 연합과 재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연합은 유연하게 할 수 있는데, 통합은 무조건 안된다는 식의 발상이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국민참여당이 진보이냐, 신자유주의자냐,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세력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의 고민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국민참여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진보신당과 통합 및 연합을 논의할 상황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국민참여당이 차지하고 있는 포지션과 지지기반의 문제입니다. 즉 대략 5~10%로 추정되는 非민주 非진보의 대중들을 어떻게 진보정치가 확보하고 흡수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민노당이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었을 때도 이 층을 안정적으로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이 층을 기반으로 한 정치집단과 정치인이 멀리는 박찬종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과 국민참여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층을 진보정치의 혁신과 확장을 통해 흡수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국민참여당이 망하더라도 제2, 제3의 국참당과 창조당이 생겨날 것이며, 진보정치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보신당을 비롯한 진보정치가 국참당 문제를 바라볼 때 고민해야 할 지점은 이들과 연합통합할 것인가 아니면 일부만 수용할 것인가 아니며 이들을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대표 대변하고 있는 대중들의 흐름을 어떻게 진보정치가 흡수하고 수용해낼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장규 동지, 동지는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고민에서 어떤 결론과 처방이 나오더라도 그 고민에서 피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경적이고 개량화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 더, 이번 지방선거에서 우리 진보신당의 광역의원 정당지지율은 3.13%입니다. 기초의원 정당지지율은 그보다 조금 낮습니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18대 총선 정당지지율 2.94%보다는 조금 올랐고, 특히 3% 기준을 통과한 것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겠지만 광역의원 정당지지에서 창조한국당은 전국 16개 시도에서 한명도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즉 창조한국당의 지지율이 0%라는 것이죠. 만약 이들이 광역 비례를 내어서 진보신당의 지지율 중에서 0.13%만 가져가도 우리는 3% 기준을 못 넘겼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실천이 핵심이지만 다른 정당들과의 관계 또는 정치지형이 미치는 효과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우리의 전략전술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발상입니다.

 

첫째, 진보신당의 물리력과 지역 및 현장에서의 근거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민주노동당과 통합을 하든, 더 큰 틀에서 연합이 이루어지든, 그것이 실패하여 독자진로를 모색하든 스스로의 물리력과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인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조당의 현재 모습이 그런 의미에서 반면교사의 모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기반과 물리력이 탄탄할수록 우리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정치활동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진보대연합으로 대변되는 진보정치의 재편 방향에 대해 전당적인 논의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당발특위가 그 논의를 대행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당원들 속에서, 당발특위 바깥에서 벌어지는 당의 진로를 둘러싼 의견들을 수렴 정리하여 당대회 혹은 당원총투표 등의 의결구조에 내놓는 것이 핵심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애매모호한 절충한을 만드는 것이 당발특위의 역할이 아니라 정세인식과 진로, 정치전략을 명확하게 하는 안들이 당원들에게 제출되고 당원들이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발특위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하여 이장규 동지가 당발특위에 들어가든 아니든 이 역할을 방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진보신당의 성장 발전 방안을 내놓든 진보정치의 재편과 연합을 통한 통합 진보정당 건설의 방안을 내놓든 토론이 필요합니다. 저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관계를 핵심으로 하고, 창조한국당과 사회당을 포함하는 정당들의 틀을 한 축으로 하고, 이를 조직적 정치적으로 엄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민주노총과 진보대연합교수연구자모임(진보교연)을 축으로 하는 진보대연합의 전망과 진로를 모색하는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진보대통합 시민회의는 현재 저의 판단으로는 이 틀과 축에 굳이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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