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8월 24일) 금정굴의 신목을 옮겼다.

신목이란 말 그대로 신의 나무라는 뜻인데 샤머님즘에서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 나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오색 댕기를 매어 둔 나무를 말한다. 


2000년 고양금정굴공대위를 확대개편하면서 매년 위령제 즈음 조형물을 세웠는데 2002년에 '산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를 세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신목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방부처리를 하면 되지만 환경오염을 시키기 때문에 방부처리를 지양하다보니 썩어가면서 안전상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어서 이번에 옮기게 되었다.


이번에 옮긴 신목은 고양시 수장고로 옮겨서 보관하게 된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8월 23일(토)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가 주최하는 항일역사유적지 탐방을 갔다왔다. 지난 6월 21일 고양지역의 항일역사유적지 탐방에 이어 두번째로 이번에는 파주지역의 항일유적지 탐방이다. 나는 지난번 탐방에는 가지 못했고 이번에 참여하게 되었다. 


파주지역항일유적지탐방지역. 자료집까지 꼼꼼히 만들었다.




파주 통일동산 옆에 있는 장준하선생묘역


장준하선생묘역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사무국장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설명해줬는데 친일로 들어서는 계기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시기로 나눠서 볼 수 있다면서 대부분의 인사들이 친일로 들어서는 계기가 태평양전쟁이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누군가는 일본의 패망을 보았는데, 누군가는 한민족의 독립의 불가능성을 본 것이다. 



민족화해센터 참회와 속죄의 성당. 남북한이 함께 만든 성당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참회와 속죄의 성당 영상(영상이 안보이시는 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aTjadj56P4c 






한글학자 정태진 선생 생가


강란숙시인이 이기형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있습니다.


시를 낭송중인 권옥희시인



파주의 3.1만세운동 기념비




파주자원봉사센터장인 김영선소장님은 파주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발굴하고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광탄면사무소에 있는 3.1 독립운동 발상비



독립운동가 심상각선생의 손자인 심재만선생이 심상각선생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심상각선생의 묘소입니다.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8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KYC주최로 ‘동아시아史 이해를 위한 중국평화여행_상해, 항주, 남경에서 생각하는 역사 그리고 평화’(후원 동북아역사재단)라는 매우 긴 제목의 긴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여행을 생각할 때는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가는 여행으로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2011년 심양과 대련, 단동을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을 준비한 쪽에서 너무 완벽하게 준비를 한 반면, 우리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너무 편하게 갔다 온 기억이 났다. 준비해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은 컸지만 편한 만큼, 준비하지 않은 만큼 남는 것도 많지 않았다. 2012년과 2013년 일본 평화여행을 다녀올 때는 사전에 공부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항상 사람을 만나고 왔고 그런 만큼 감동과 배우는 것도 컸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유적지만 방문하는 것이어서 걱정이 컸다. 중국사회는 민간영역은 있지만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단체나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의 김구선생 집무실


다행인 것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정책실장님이 동행을 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평소처럼 너무 어렵게 설명해 줄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했다. 나는 중국 가기 전에 진행한 1차 교육을 참석하진 못했고, 2차 교육만 받았다. 1차 교육에서 박한용실장님이 권장한 책들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자동선생의 ‘임정의 품안에서’와 그의 어머니인 정정화선생의 ‘장강일기’, 그리고 김학철 선생의 ‘최후의 분대장’과 이원규선생이 쓴 ‘약산 김원봉’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와 김학철선생의 ‘최후의 분대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두 분 모두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알려주셨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와 상해 임시정부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를 읽으면서 의외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국제정세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상해임시정부는 왜 외교노선을 주축으로 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일정 정도 해소되었다. 임시정부가 만들어 진 것도 제1차 세계대전이후의 국제정세와 관계가 깊고, 이후의 침체를 겪지만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흥의 김구선생 피난처



이번 여행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중에 상해와 가흥, 항주의 임시정부청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던 곳을 견학을 했다. 상해의 임시정부청사는 좁은 공간에서 관람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현지 안내인의 무성의한 안내만 따라다니면서 듣다가 순식간에 출구로 나와 버리게 되는 상황도 당황스러웠다. 잔뜩 기대하고 간 상해 임시정부터였는데 많이 아쉬웠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임시정부 터라면 좀 더 상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가흥과 항주의 임시정부 청사 터와 임정 요인들 거주지도 둘러보았는데 가흥의 김구피난처와 항주의 임정유적지는 보전이 잘 되어 있었다. 가흥의 김구선생 피난처가 효성그룹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점과 항주의 임시정부유적지가 복원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완결성이 높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다만 짧은 시간이어서 충분히 기념관의 내용을 보기에는 어려웠다.

귀국 후에 항주의 임지정부기념관의 판넬을 스마트폰으로 전부 찍은 것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2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체제 재정비,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1933년 5월 김구와 장개석의 회견, 1934년 8월 한중합작 군사양성,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 10월 가흥 남호에서 선상회의를 통해 조직정비, 11월 한국국민당 창당 및 이후의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의 각 세력들이 통합을 위해 노력한 과정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항주의 임시정부청사 터


비용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미리 답사를 갔었다면 어떤 곳에서 오래 머물고 어떤 곳에서는 장소만 확인하고 가는 방식으로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사실 상해의 임시정부터는 확인만하고 항주의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이번 여행을 통해서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전에는 임시정부가 안창호선생 중심의 체제였다는 점, 그리고 윤의사의 의거로 안창호선생이 체포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다니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김구선생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리더쉽이 형성되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과 조선의용대

김학철 선생의 ‘최후의 분대장’을 읽으면서 조선의용대와 김원봉선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소 백범 김구선생보다 현상금이 많이 걸린 분이고 사회주의적 경향의 독립운동가로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김학철선생의 ‘최후의 분대장’과 이원규씨가 쓴 ‘약산 김원봉’을 읽고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선생이 민족혁명당 창당대회를 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당



김학철선생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당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운동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박한용실장님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환상을 갖거나 독립운동을 영웅시하는 것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방문한 곳은 대부분은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곳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유적은 아직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복원이 되었고 많이 알려졌지만 약산 김원봉 선생 유적은 따로 없다. 임시정부기념관에서 판넬 하나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백범 김구선생보다 약산 김원봉선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약산 김원봉선생의 노선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노선이라고 본다. 약산 김원봉선생의 의열단활동은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 준비론과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다르고, 당장 무력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독립론과도 다르다. 당장 무장독립을 하자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군대조차 제대로 보유하지 못한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의열투쟁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은 의열투쟁에 최선을 다하고 그 운동의 한계에 봉착해서 군대를 양성해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당정부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조선의용대까지 조직하게 된 것이다. 국민당정부의 황포군관학교는 제1차 국공합작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의 좌우합작이 독립운동의 좌우합작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조선의용대원들이 화북으로 떠날 때 약산 김원봉선생이 함께 가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직접 일제와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정부라는 틀 속에서 군대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남경의 이제항 위안소 터


이번 여행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 관련 유적지는 남경의 금릉대학이 전부였던 것 같다. 약산 김원봉선생은 베이징과 상해, 남경에서 주로 활약했는데 아직까지 관심도 적고,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아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약산 김원봉선생을 사회주의자로 보든 또는 민족주의자로 보든 그 시대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혁명과 독립운동

이번 여행지 중에는 중국혁명운동과 관련된 곳도 방문하였다. 손중산고거, 로신기념관관, 송경령기념관(만국공묘), 저보성기념관 그리고 남경대학살기념관을 방문했다. 손문은 신해혁명을 일으켜서 삼민주의로 중화민국을 건국한 사람이다. 손문은 광동성에서 호법정부를 세울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준해 준 사람이다.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애를 써 주었다. 저보성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을 일으킨 혁명원로로 백범 김구가 도피생활을 할 때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장제스는 윤봉길의사의 의거이후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도와주었다. 중국의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손문선생의 옛집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이 독립운동을 하는 지역의 특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운동과 함께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 일부는 중국 공산당의 남창 봉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독립운동에 전력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중국의 혁명운동에도 참여하는 것이 올바르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량상 맞느냐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백범 김구선생과 약산 김원봉선생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분열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약산 김원봉선생은 화북으로 동지들을 떠나보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적을 떠나 인간이 각종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같은 이상이 있었기에 함께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또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물론 여전히 잘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국제정세를 절대 도외시 했서는 안된다는 점을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누가 더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느냐보다는 어쩌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어야 했느냐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힘이 있든 없든 생각이 같든 다르든 적어도 대외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정부를 유지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상해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선생의 완고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연합국의 일원이 되려고 무던히 노력한 점들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나라를 잃는 과정을 보면 처음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었고, 러일전쟁으로 조선이 의존했던 러시아도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영일동맹과 미-일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독립은 그 반대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어느 나라도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이 우호적으로 지원해줬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끝내는 내부의 이질성을 담아낸 통일전선 정부를 만들고 유지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해방후의 갈등속에서도 분단과 전쟁을 막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어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의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남경대학살 기념관의 아쉬움

마지막으로 남경대학살기념관에 가서 느낀 점을 적어 본다. 규모의 어마어마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기념과 2층에서 본 판넬의 내용이다. 판넬에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0여년의 역사에서 일본은 침략만을 했을 뿐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박한용실장님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근대역사는 침략의 역사였다는 내용의 전시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즉 근대 중국에게 일본은 침략자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처럼 침략자이지만 물질적 근대화의 초석이라는 양면적 인식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중국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근대 아시아에서 일본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은 무엇이었을까? 나 스스로에게 우리들 스스로에게 던져 보고 싶다.​

남경기념관. 내부의 전시내용보다 외부의 전시물이 훨씬 와닿았습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서 느낀 아쉬움도 있다. 1층의 전시실 마지막의 에필로그 판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We should not forget that small and weak nations will always be bullied and invaded by powerful nations' 결국 힘이 약하면 강대국에게 침략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놀라왔다. 또한 난징대학살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단지 힘이 없어서 당했으니 힘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주의만은 아니라고 본다. 침략자라고 다 일본처럼 학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전쟁자체가 학살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전쟁이 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관 내에 써있는 마지막 결론. 힘을 키우자?



여행은 식사와 같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편한 사람과의 식사가 아니면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듯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가진 여행이라도 동행자가 불편하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다. 식사의 내용이 부실하더라도 편하고 좋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천천히 음식의 맛을 느끼면서 수다를 떨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식사를 한다. 하지만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하면 할 말도 없고 그저 먹는 것만 생각하고 빨리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번 여행은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해서 좋았다.


서울KYC평화길라잡이 이재정


Posted by 별이빛나는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