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서대문형무소



개화운동으로 투옥된 이승만대통령,

재임기간 가장 많이 사형시켜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은 개화・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성감옥의 전신인 전옥서를 시작으로 서로문감옥을 거쳐 서대문감옥에서 6연여의 옥고를 치뤘다. 이승만대통령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독립졍신'을 비롯하여 '한영사전' 그리고 여러 편의 논설을 썼다. 해방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두 번씩이나 서대문감옥을 시찰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에 그에게 도전하는 많은 정치범을 투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는 몇 명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승만대통령 12년 동안 집행된 사형건수를 보면 335명으로 월평균 2.4명을 사형시켰는데, 이는 월평균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승만정부시설 좌우익 대립과 친일파청산 문제 등으로 최남선 등 친일파들이 수감되기도 하지만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대립하는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친일경찰의 발호에 맞서 싸웠던 최능진은 친일경찰들과의 대립으로 권고사직당하고, 이후 선거에서 이승만의 선거구에 나왔다가 이승만세력의 방해로 후보등록이 무효화되고, 한국전쟁 와중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을 당한다.(1951. 2.11) 또한 대한민국 초대국회의 부의장과 이승만정부의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1956년 5․15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간첩혐의로 처형하였다.




<경향신문 2009.10.11>




좌익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박정희대통령,

쿠데타 후 수많은 정치・사상범 사형시켜


박정희대통령 또한 자신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이승만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죄없는 많은 정치범을 사형시켰다.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남북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김구와 김규식 등의 민족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2개월 뒤에 여수와 순천에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대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없애는 숙군작업이 일어났다. 1948년 11월 박정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좌익혐의로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 박정희의 자백이후 군내의 만주인맥들의 구명이 이루어졌고, 그는 형인 박상희가 대구폭동 때 사망하면서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으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승만정부에서 좌익혐의로 사선을 넘나들었던 박정희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4.19 당시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최인규내무장관과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 정치깡패두목 이정재를 사형시켰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괴뢰정권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해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받은지 넉 달만에 사형을 당했으며, 북한 지령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조종하고 국가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인혁당 사건 희생자 7명은 사형 확정된 지 18시간만에 사형 당했다. 박정희정권 기간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악연과 화해?


전두환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전두환 중심 신군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김대중대통령은 사형을 면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또한 신군부가 집권을 하면서 김영삼대통령 또한 가택연금을 당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영삼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중형을 선고한 반면, 전두환정권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대중대통령은 대통령이 당선된 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해서 이들이 사면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김영삼대통령은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사면하고, 며칠 뒤인 12월 30일에는 231)명의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민간인 수백명을 죽인 권력자는 사면을 받는 반면 흉악범이라는 개인들은 조용히 사라지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가?



1) 김삼웅은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의 ‘이승만과 서대문감옥’편에서 ‘우남(이승만)이 언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옥고를 치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무기로수 감형된 우남은 언제부터인지 서대문감옥으로 옮겨져서 비교적 수월한 옥살이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승만대통령은 1904년 8월 9일에 석방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은 1908년에 신축되었으므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함.

2) 정부수립이후 920명을 사형시켰다는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의 기록에는 김영삼정부에서 11명을 사형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기록간에 상이한 부분이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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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이빛나는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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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운찬 2009.12.22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지만... 생각해 볼 글이네요.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만행을 생각하며... 그런 만행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기억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화길라잡이로 활동하시나 보네요. 멋진 활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2. 연세대생 2011.11.2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년 이승만은 많은 교훈을 준다. 나중의 독재행적과는 구별되는...

  3. 까망가방하양필통 2016.08.28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와 글 잘 보고 갑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와서 다녀온 후기를 적으면서
    특히 해방후에 이런저런 사실들에 먹먹한 감 숨길수 없네요,
    여기 글중에 일부는 발췌하여 옮겨적습니다.
    원글 발췌한곳 분명히 표기하겟습니다.